“땅속 문화재 처음으로 만난다는 게 발굴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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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 문화재 처음으로 만난다는 게 발굴의 매력”
  • 김현우
  • 승인 2022.09.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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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설계하는 인천 문화](4)
[인터뷰 - 인천의 연구자들③]
국토문화재연구원 박만홍 팀장
글·사진 = 김현우 화수분제작소 대표

 

-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국토문화재연구원에서 일하고 있는 박만홍입니다. 주로 매장문화재를 다루고 있어요. 또, 명지대학교 전통건축학과에서 매장문화재와 관련된 수업도 하고 있습니다. 매장문화재라는 용어가 익숙하지 않은 분들도 있는데요. 쉽게 말하면 땅속에 묻혀 있는 문화재를 발굴하고 조사하는 일입니다. 인천에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사 와서 현재까지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어요. 30년 넘게 살고 있으니 고향이나 마찬가지죠.


- 어떤 계기로 연구자의 길로 들어섰나요?
전 건축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전통건축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전통건축을 좋아하게 된 건 유홍준 교수님의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덕분이에요. 고등학교 다닐때 그 책이 3권까지 나왔는데, 그걸 다 읽었죠. 책이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또, 전통건축물에서는 진짜 진한 나무 냄새가 나요. 그 냄새도 좋았고, 옛날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도 정말 좋았어요. 옛날에 우리나라 조상들이 실제로 살았던 곳이니까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지금의 아파트처럼 획일화된 공간이 아니라, 집주인 또는 거주자에 따라 매우 달랐어요. 전통건축이 서로 비슷비슷하게 보이지만, 그 안에서 변화가 또 많거든요.
그래서 대학교 1학년 때 옛 민가를 연구하는 ‘민가연구회’라는 작업실에 들어갔어요. 졸업할 때까지 작업실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답사도 다니고 민가도 실측하고 스터디도 했죠. 특히 답사를 정말 좋아했는데, 전국 여러 곳을 다니면서 내가 모르던 문화재를 직접 만지고 보는 게 정말 재미있었어요. ‘말로만 듣고 글로만 읽은 문화재를 내가 직접 보는구나.’ 하면서요. 1학년 때는 학교를 거의 안 나가고 답사만 다녔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 작업실에서 만난 동문들과 만나요. 살 부딪히면서 같이 생활했던 지라 작업실 사람들끼리 관계가 굉장히 끈끈했어요. 그 작업실에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실측 조사도 나가고 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조사에도 참여했던 게 지금의 일을 하는 밑거름이 된 것 같아요.
또, 매장문화재 발굴은 2010년에 처음 접했어요. 그때 제가 워킹 홀리데이를 다녀온 직후였는데, 아는 선생님께서 발굴 현장에 한번 놀러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거기가 서울에 있는 규모가 큰 현장이었는데, 조선시대 사람이 살던 집터가 드러나는게 정말 신기해 보였어요. 땅 밑에 묻혀 있던 지난 오랜 역사가 켜켜이 나오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우연히 구경 갔던 게 계기가 되어서 지금까지 매장문화재를 다루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 지금 인천에서는 어떤 연구를 하고 있나요?
현재 인천문화재단에서 추진하는 서해 접경지역에 위치한 근대기 포구 학술조사에 참여하고 있어요. 그 옛날에는 해안가나 강가에 포구가 정말 많이 있었죠. 그 포구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 역사는 어떻게 지나왔는지, 그곳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등을 함께하는 분들과 분야별로 나눠서 조사하고 있어요.
거기서 저는 조선지지자료, 한국수산지, 지적원도, 임야원도, 토지조사부 등의 자료를 참고해서 포구의 원위치를 파악하고 있어요.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제가 이야기한 자료 중 대부분은 주로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졌어요. 당시 우리나라의 자원을 수탈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관련 조사가 전국적으로 벌어졌고 그로 인해 많은 기록이 남은 거죠.

사실 이 포구 조사는 2015년도부터 해왔어요. 그때는 김포문화재단에서 김포 지역에 있는 포구를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했죠. 그게 계기가 되어서 지금은 인천문화재단과 함께하고 있고요. 강화도와 김포에 있는 포구들은 서로 다른 지역에 있지만 연결되어 있어요. 그 옛날의 수많은 나루 또는 포구가 모두 일종의 네트워크로 이어져 있었죠. 저는 이 포구 조사가 지역 문화사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자료가 되리라고 생각해요. 작년에 1차 조사 결과로 <강화도의 열린 물길, 번성했던 포구의 기억>이라는 제목의 보고서가 나왔어요. 거기에 포구 위치에 대한 제 조사 내용도 함께 실려 있어요.
그 밖에 제가 근무하고 있는 국토문화재연구원에서도 강화도 또는 그 인근에 있는 매장문화재 발굴 조사를 꾸준히 해오고 있어요. 그래서 조만간 강화도 관청리에 조사하러 갈 예정입니다. 고려가 몽골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시기인 강도 시기가 있었잖아요? 그래서 그 주변 필지에 고려시대 건물지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더라고요. 아마 당분간 평일에는 관청리에서 조사하고, 주말에는 포구를 조사하러 다닐 것 같아요.

 

- 연구자로서 바라보는 인천은 어떤 곳인가요?
사실 인천이 어떤 곳이라고 말할 정도로 제가 충분한 연구나 조사를 하지 않아서 답변드리기가 너무 부끄럽네요. 오히려 인천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더 많이 조사하고 관련 발표도 하고 그랬죠. 인천에 관심이 없던 건 아닌데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번 포구 조사가 제게는 인천을 알 수 있는 참 좋은 기회예요.
저는 어려서부터 여기 문학산 밑에서 자라왔어요. 사실 이 주변에 인천도호부관아, 문학산성, 학산서원 등 문화재가 많죠. 또, 아시아드선수촌 아파트 단지에서는 상당히 많은 원삼국 시대 주거지들이 나왔고요. 인천은 여러 시기가 제각기 뚜렷하게 공존하는데, 각 시대별 레이어가 겹겹이 누적된 것을 제가 사는 동네를 통해서도 알 수 있어요. 이처럼 인천은 여러 역사를 모두 볼 수 있는 곳이라 생각돼요.


- 연구자로서 언제 보람을 느끼나요?
아무래도 제가 조사한 것들이 잘 정리되어서 논문으로 발표될 때 가장 기분이 좋죠. 또, 그 결과물이 또 다른 연구로 이어지면 더더욱 좋고요. 왜냐하면 연구는 한번으로 끝날 수 없거든요. 아무리 완벽해 보여도 부족한 부분이 있어요. 이를테면, 이 연구가 또 다른 연구로 나아가는 하나의 벽돌이 되는 거예요. 어떤 연구를 하는데 있어 여러 벽돌이 끊임없이 쌓일 텐데, 그 과정에 나도 뭔가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 참 뿌듯하죠.
또, 현장에서 발굴할 때는 어떤 문화재를 내가 제일 처음으로 본다는 매력이 있어요. 매장문화재는 발굴되지 않으면 관련 연구가 이뤄질 수 없는데, 그 현장을 그 누구보다 제가 처음으로 보는 거니까요. 처음에 조사를 시작한 사람이 그 문화재를 가장 많이 보고 파악하게 돼요. 그 조사를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 같아요.
또, 제가 여러 조사를 거쳐 매장문화재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 곳에서 그 문화재를 실제로 딱 발굴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전율을 느껴요. 온몸이 짜릿짜릿하죠. 문헌으로만 확인한 건물의 구조와 형태가 제가 생각한 대로 그대로 드러날 때가 있어요. 예를 들면, 이쯤이 부엌이겠거니 하고 짐작했는데, 실제로 아궁이가 나타났다거나 하는 거죠. 일전에 한국은행 본관을 조사할 때도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도면 그대로 나와서 깜짝 놀랐어요. 땅을 파서 내려갔는데, 제가 생각한 곳에서 기초에 해당하는 나무 말뚝들을 찾아냈죠. 그럴 때는 마치 제가 역사 기록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럴 때는 화투장을 뒤집는 것처럼 짜릿하죠. ‘내가 생각한 패가 맞았구나!’ 이러면서요.


- 우리나라에 매장문화재가 아직 많이 남아 있나요?
네, 우리나라가 많이 개발됐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요. 역사가 오래됐기 때문에 매장문화재가 많은 장소에 남아 있어요. 조사해야 할 곳도 많고, 그 조사가 또 다른 연구로 이어지는 것까지 생각하면 해야 할 일이 많아요. 예전에는 매장문화재가 조만간 다 사라진다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국토의 크기는 한정되어 있고, 개발이 이뤄질수록 계속 사라지니까요. 하지만 할 일은 많고, 추후에 북한에서도 많은 조사를 할 수 있다면 일의 범위는 더 늘어날 수 있죠.


- 연구자로서 가지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요새 박사 논문을 쓰고 있어요. 고려시대의 원(院)(주: 공무로 여행하는 이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던 숙박시설)을 주제로 하고 있죠. 좀 더 말씀드리면, 이 원이 불교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 운영 주체가 대부분 불교와 관련한 분들이 많았는데, 당시 고려에서는 불교 세력의 영향력이 컸죠. 불교를 이끌어가는 계층이 당대 손꼽히는 지식인 계층인데다 불교 자체가 재정 규모도 컸고 좋은 네트워크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이와 관련하여 원이 건축학적으로 어떠했는지, 이를테면, 불교 사찰과 대비하여 어떤 형태로 지어졌고, 어떤 위치에 세워졌는지 등을 알아보려해요. 남아 있는 자료는 대부분 기록 문헌이에요. 그런데 매장문화재 발굴 조사로 일부 드러난 게 있어요. 그래서 그 발굴된 사례를 바탕으로 이야기할 것 같아요. 사실 더 일찍 썼어야 했는데, 지금도 헤매고 있네요. 좋은 결과가 있도록 계속해서 열심히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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