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의 여가에 독서하며 이치를 탐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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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의 여가에 독서하며 이치를 탐구하기를..."
  • 구지현
  • 승인 2022.08.1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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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에서 만나는 소남 윤동규]
(5) 스승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

소남 종택에 소장된 간찰에는 이맹휴(李孟休, 1713-1751)에게 보낸 편지도 몇 편 남아있다. 이맹휴는 성호가 서른이 넘어서야 얻은 귀한 아들이자 유일한 아들이었다. 이번에는 그에게 보낸 편지 한 편을 읽어보고자 한다.

성호가 맹자를 읽고 있었던 어느 날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처음 이름을 “맹(孟)”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맹에는 맏이라는 뜻도 있으니 아명으로는 썩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돌이 되던 해에 돌림자를 붙여 “맹휴”라고 하고 자를 “순수(醇叟)”라고 하였는데, 순수도 맹자를 의미하는 말이다. 당나라 유학자 한유가 맹자를 “순정하디 순정하다[醇乎醇]”라고 평가한 말에서 따온 글자이다. 이맹휴가 처음 이름 자를 받았던 돌 잔치에 소남도 참석하였다. 후에 스승이 돌아가시자 지은 제문에도 이 날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아아! 슬픕니다. 제가 불민한데도 순수가 처음 이름 자를 받던 돌날 기린아를 축하하는 잔치에 참석하도록 허락을 받고 스승을 모시는 말석에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오십 년 의심나면 질정하고 질정하면 깨닫게 해주시고 잘 인도해주시고 걱정해주시는 것이 삼생과 같으셨습니다.(尹東奎, 「祭文」)

 

삼생은 나를 살려주는 세 사람인 아버지, 스승, 임금을 가리키는데, 소남에게 성호는 평생 아버지이자 스승이자 임금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맹휴의 돌날은 성호의 아들이 처음 소개되는 날이자 소남이 제자로서 정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가 된 날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평생 지속되었다.

소남은 이맹휴에게 큰 형님이자 스승과 같은 존재였으리라. 훗날 연배가 비슷한 안정복이 성호를 처음 뵙는 자리에서 이맹휴는 자리에 없는 소남을 거론하며 “윤장께서는 주염계, 정명도의 기상을 지니고 계시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염계 주돈이, 명도선생 정호는 모두 주자에게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그만큼 소남을 높고 큰 학자로 여겼던 것이다.

이맹휴는 20대 초반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특명으로 한성부 주부에 임명되었다. 또 1744년에는 예조 정랑이 되어 국가의 문서를 정리하고 출간하는 일을 맡았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공무로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1745년 4월 인천에 있던 소남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떨어져 산 지 오래라 반듯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훌륭한 의논을 듣지 못하니 마음이 어찌 적적하지 않겠는가? 초여름이 덥네. 삼가 생각하니 벼슬길은 진중하고 그리운 마음은 구구하니, 예조에서 오래 고생하는 것에 탄식하게 되나 직임을 맡으면 그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이니 어느 곳인들 마음은 관대하고 몸은 편하지 않겠는가? 지난번 성호께 갔을 때 『춘관지』를 대략 보니 사실을 잘 기술하여 열심히 노력한 것을 알 수 있었네. 그러나 한쪽 방향으로 몰두할까 걱정스러웠으니, 이러다가 혹시라도 초목의 경계가 많음을 면치 못할까 해서이네. 공무의 여가에 독서하며 이치를 탐구하기를 깊이 기원하니, 본원을 잘 기르는 일은 없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네. 내 생각에 순수는 이런 일에 이르지는 않겠으나 우리들이 순수에게 의지하고 바라는 것을 본디 모르는 것은 모르는 법이라 이에 감히 충고하여 어리석음을 드러내네.……(尹東奎, 「乙丑四月初七日」)

 

위 편지를 보면 소남의 마음은 여러 가지로 갈리는 것 같다. 사적으로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여 그립기도 하지만 나라를 생각하면 공무에 충실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중책을 맡아 오랫동안 고생하는 것을 보면 안쓰럽지만 어려워하지 말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라고 말한다.

편지에서 말한 『춘관지』는 예조에서 관장하는 사항의 전례와 법령을 정리한 책이다. 여기에는 국가 예절인 외교도 포함되기 때문에 대외관계에 관한 사항도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료를 풍부하게 수집한 이맹휴는 이어서 『접왜역년고』라는 일본과의 외교사례집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이맹휴는 이것을 대학자인 아버지에게 보내 검토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소남이 곁에서 스승을 도와 함께 검토하였던 것이다. 소남은 이 때도 두 가지 마음이 든 것 같다. 이렇게 훌륭한 책을 쓴 이맹휴가 대견하면서도 혹시라도 역사를 파느라 근본이 되는 학문에 소홀할까 염려가 되었다. 초목은 뿌리가 상하면 가지는 저절로 말라버린다. 학문도 마찬가지이니 근본이 되는 성리학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던 것이다. 소남은 이맹휴가 돌 때부터 자라는 모습을 다 보며 가까이 지냈을 텐데도 상대를 존중하면서 조심스럽게 하는 충고가 글자마다 보인다.

이맹휴는 만경현감으로 부임하였고 이후 안타깝게도 병을 앓다가 1751년 죽었다. 그 사이 쓴 편지를 보면 그의 경사에 기뻐하고 그의 병을 걱정하면서도 학문을 독려하는 소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소남이 이맹휴를 대하는 모습에서 성호가 소남을 대하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성호가 아버지라서 할 수 없었던 일을 제자로서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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