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 박사의 3가지 처방
상태바
빅터 프랭클 박사의 3가지 처방
  • 최원영
  • 승인 2022.08.09 09: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원영의 책갈피] (64)

 

https://youtu.be/tpET_Nhb-MY

오늘은 여러분도 읽어보셨을 법한 빅터 프랭클 박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 나온 구절에서 지혜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을 빅터 프랭클 박사는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알고, 우리의 일상에서 적용해볼 만한 것은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지난 영상보다는 분량이 조금 길지만 여러분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신의학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에 갇혀 절망 속에서 지냈지만 결국에는 살아남아 ‘로고테라피’라는 심리요법을 개척했습니다.

《유대인의 초상》(함규진)에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도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체포되어 붙들려가는 사람, 그것도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강렬할 때 아내와 헤어져야 했던 상실의 아픔,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죽음밖에 없다는 절망감, 이런 상태에 만약 제가 놓였다면 어떨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끔찍했습니다.

책에 묘사된 대로 그가 끌려가던 당시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1,500명의 사람이 기차를 타고 며칠 밤과 낮을 계속해 달렸다. 열차 한 칸에 80명이 타고 있었다. 사람들은 마지막 남은 소지품을 담은 짐꾸러미 위에 누워 있었다. 열차 안이 너무나 꽉 차서 창문 위쪽으로 겨우 잿빛 새벽의 기운이 들어올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는 이 기차가 군수공장으로 가는 것이기를 바랐다. 잠시 후 기차가 덜컹거리며 옆 선로로 들어섰다. 종착역이 가까워진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때 불안에 떨고 있던 사람들 틈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우슈비츠야! 저기, 저기 팻말이!”

그 순간 모든 사람의 심장이 멈추었다. 아우슈비츠! 가스실, 화장터, 대학살! 그 모든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이름, 아우슈비츠!

새벽이 되자 거대한 수용소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길게 뻗어 있는 몇 겹의 철조망 담장, 감시탑과 탐조등, 그리고 희뿌연 새벽빛 속에 미지의 목적지를 향해 뻗어 있는 황량한 길을 따라 질질 끌려가고 있는 초라하고 누추한 사람들의 행렬. 가끔 고함과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사람들이 대롱대롱 매달린 교수대를 상상했다.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사실 이것만 해도 괜찮은 편이었다. 왜냐하면 그후로 점점 더 끔찍하고 엄청난 공포와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도착해서는 어땠을까요?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자마자 수감자들은 일단 남녀로 분류되고 그다음에 친위대 장교 앞에 서게 되는데, 그가 말없이 왼쪽을 가리키느냐 오른쪽을 가리키느냐가 삶과 죽음을 갈랐다.

왼쪽으로 간 사람들은 곧바로 가스실로 갔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연기로 변해서 아우슈비츠의 하늘 위로 날아갔다. 대다수가 왼쪽이었으며, 잘 부려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소수만 생명을 연장했는데 프랭클은 튼튼해 보이지 않았는데도 오른쪽이었다. 그 뒤로도 잘못하면 맞아 죽을 뻔하던 상황에서 공습경보가 울려 살아나기도 했다.

최악의 고통과 불안과 절망의 시간이 이어졌다. 일상적인 욕설과 폭행, 비위생적인 환경과 혹한, 끝없이 이어지는 굶주림,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강제 노동, 옆에서 죽어가는 동료와 어디서 죽었을지도 모르는 가족에 대한 연민, 죽음이 자기 자신에게도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사실이 주는 미칠 듯한 공포였다.

이쯤 되면 견딜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는 잘 버텨냈고, 그때의 슬픈 상황을 자신이 창시한 로고테라피를 증명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그러나 프랭클은 꺾이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와 주위 사람들을 위로하고 고통 속에서도 평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라는 니체의 말을 신조로 삼았으며, 크게 세 가지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가 찾은 삶의 의미 세 가지란 무엇일까요? 그가 찾은 그것이 그가 생사를 넘나들면서 깨달은 것이라면 우리에게도 충분히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그가 말하는 첫 번째 삶의 의미는 ‘자신이 해야 할 일, 자신밖에 할 수 없는 일’을 찾는 겁니다.

프랭클 박사는 오랫동안 써온 원고를 수용소에도 가져왔으며 마지막까지 놓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빼앗겼다. 그래도 틈날 때마다 적을 것을 찾아서 원고를 이어나가려 했다. 자신이 정립했고 지금은 한창 검증 중인 로고테라피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절망에 몸부림칠 여지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해방되기 얼마 전부터는 의사로서 동료 환자들의 상태를 돌보는 일을 했으며, 그 외에는 누구도 할 수 없는 그 일이 자신이 살아갈 힘을 주었다.

그렇다고 무언가 거창한 사업이나 전문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누구의 부모이고, 자식이고, 동료이고, 친구이기만 해도 되지 않은가. 가족이나 동료나 친구가 그렇게 쉽게 ‘대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우리는 모두 우리밖에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독보적인 존재가 아닌가.

그가 말하는 두 번째 삶의 의미는 ‘사랑을 찾는다’라는 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이 지루한 세상에 남아 있게 만드는 유일한 가치이며, 우리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죽음도 불사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며,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영혼으로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절망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못하리라.

‘때때로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하나둘씩 빛을 잃어가고, 아침을 알리는 연분홍빛이 짙은 먹구름 뒤에서 서서히 퍼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아내 모습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아주 정확하게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녀가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녀가 웃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진솔하면서도 용기를 주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얼어붙은 땅을 파면서 서 있었다. 감시병이 지나가면서 욕을 했고, 나는 또다시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자 점점 더 그녀가 곁에 있는 것같이 느껴졌으며, 그녀는 정말로 내 곁에 있었다. 그녀를 만질 수 있을 것 같았고, 손을 뻗쳐서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너무나 생생했다. 그녀가 정말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내가 파놓은 흙더미 위에 앉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 묘사를 통해 프랭클은, 인간은 사랑으로 구원받으며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독자들에게 고백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어떤 고난과 역경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접하면서 ‘나는 지금 누구를 사랑하고 있을까’를 떠올렸습니다.

세 번째 삶의 의미는 ‘고난을 받아들인다’라는 겁니다.

아우슈비츠에 비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우리 모두는 고민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객관적으로 보면 딱히 힘들게 사는 것도 아닌데, 공연히 마음이 자꾸만 가라앉고 세상의 빛이 바래는 느낌도 든다. 아무리 즐거운 일이 있어도 인생은 기본적으로 고통이며, 이를 견디며 살아갈 의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프랭클은 말한다.

“창조와 즐거움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의 의미가 있다면, 시련이 주는 의미이리라. 운명처럼, 죽음처럼, 시련은 우리 삶의 불가결한 부분이다. 고통 없고 죽음 없이 인생은 완성되지 않는다.”

고통이 크고 시련이 가혹할수록 그것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 시련을 이겨내는 자체가 의미 있고, 시련을 이겨낸 우리는 그전보다 강인한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므로 삶의 고통을 꺼리며 그것을 잊을 수단을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데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프랭클 박사가 말한 세 가지 처방, 즉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사랑의 대상’을 찾고, ‘고난을 받아들이는 태도’만 갖는다면 어떤 고난도 그대를 무너뜨리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프랭클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자신만의 ‘로고테라피’를 멋지게 만들어낼 겁니다.

빅터 프랭클은 ‘우리는 어떤 상태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그 상태에 대한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고통 때문에 불행해지는 게 아닙니다. 그 고통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는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이것이 희망입니다. 고통을 당장 없앨 수는 없지만, 그 고통을 희망의 계기로 삼는 태도만큼은 우리가 온전히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