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창 - 인천 시민愛집과 이음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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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창 - 인천 시민愛집과 이음 1977
  • 박상희
  • 승인 2021.07.19 08:1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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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읽는 도시, 인천]
(19) 바다를 향한 낡은 소파에 앉아
박상희_이음 1977 저택 밤 풍경_종이 위 수채_28.5x21cm_2021
박상희_이음 1977 저택 밤 풍경_종이 위 수채_28.5x21cm_2021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아래 계단을 내려와 보이는, 나무가 울창한 저택이 최근에 문을 활짝 열고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다. 인천 송학동의 옛 시장 관사였고 그 이전에는 일본의 사업가 코노 다케노스케의 별장이었지만 이후 1966년부터 2004년까지 인천시장 공관으로 사용하다 인천직할시 승격 40주년 기념일에 맞춰 인천 시민의 이름으로 개방하게 되었다.

어릴 적 굳게 닫힌 철문과 이끼 낀 계단의 위용에 눌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내가 있는 세계와는 분리된 곳이라고 생각했었다. 정원수가 높게 뻗어있고 담벼락마저 철옹성 같았지만, 산자락 밑이라는 구조로 대낮에도 왠지 어둡고 침침해서 그 안은 어떤지 정말 궁금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들어가 본 관사는 어릴 적 상상했던 화려한 집과는 동떨어져 보였다.

물론 아름답게 다듬어 놓은 정원수를 갖춘 마당과 정문에서 올라오는 돌계단은 동화에서나 나올 것만 같은 신비함에 몇 번이나 멈추어 주위를 둘러 보게 하였고 단아하고 고풍스러운 본관은 수많은 나무 창살로 뜨개질을 한 듯 촘촘하면서도 훌륭한 품새였다. 그러나 실내 곳곳에 묻어나는 관사만이 갖는 경직성을 보면서 매일 밤 시정에 고뇌하셨던 전직 시장님들의 노고가 느껴졌고 외관처럼 화려하기보다는 집무를 보는 여느 관료의 집이었다.

인천 시민애집과 바로 붙어있는 이음 1977’은 관사와 다른 낭만적이고 다정한 분위기의 건축물이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건축가라고 불리는 김수근(1931-1986) 선생님께서 1977년에 지은 저택이며, 한동안 폐쇄되었다가 인천도시공사에서 맡아 개항장의 근대문화자산 재생사업 1호로 정해 리모델링했다.

안내서를 보니 건축가 김수근 님께서 인천에 지은 건축물은 인천상륙작전기념관과 이기상 저택(현 이음 1977)뿐이며 집 주인인 인천 영진공사 대표 부부가 간청하여 설계 시공하게 되었다 한. 현관문을 들어서자 빨간 벽돌과 카펫이 눈에 띄고 일반 집에서 볼 수 없는 계단이 있는 내부는 한눈에 봐도 독특하고 멋진 집임을 알 수 있었다. 공간 분할 구조의 스킵 플로어 설계는 김수근 선생님의 특징이라고 한다. 바닥과 벽의 화려함은 천장에 매달린 마름모꼴 입체 조명에서 완성되었다. 기하학적으로 오려진 노란 불빛이 따뜻하면서 세련되었다. 김수근 건축가님이 이 공간에 맞게 일본에서 사 오신 등이라고 했다. 이 조명등 말고 건축주님께 선물한 것이 또 있는데 목조 배 모형이었다.

 

박상희_창이 있는 방_종이 위 수채_28.5x21cm_2021
박상희_창이 있는 방_종이 위 수채_28.5x21cm_2021

 

건축주 이기상 씨는 화평동에서 태어나 1961년 영진공사를 설립해 평생 인천항을 지켜온 주역이자 산증인으로 전통의 물류기업을 키워 인천항만의 역사를 새로 쓰신 분이시다. 특히 인천의 대소사를 위해 직접 발로 뛰시며 해결하셨다.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1999 중구 인현동 호프집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중고생 등 56명이 사망한 사건) 사고 범시민대책위원장을 자청해 수습을 진두지휘하셨고, 대한적십자사 인천지사 회장 등으로 활약하시며 인천의 그늘진 곳을 찾아가 애쓰셨던 분이셨다. 그 배는 건축주가 늘 가슴에 품고 있는 인천항을 향한 애정을 기리기 위해 드린 선물이 아닐까 생각된다. 거실에 남아있는 낡은 가죽 소파는 생전에 그가 바라본 그대로 영진공사 건물과 인천항, 그리고 바다를 향해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 본 두 침실에는 창문이 ㄱ자로 꺾여져 있었다. ㄱ자 형태의 창문은 흔치 않아 보이는데 한 면만 있는 창보다 훨씬 입체적으로 바깥을 내다볼 수 있었다. 창틀은 오래된 나무가 낡아 빛이 바랬지만 꺾여진 두 창의 꼼꼼한 상접 면을 보면서 공들여 지은 집 주인이 너무 부러울 따름이었다.

개화기의 국제도시였던 인천은 응봉산(현 자유공원) 주변의 양지바른 이곳에 외국 인사들이 너도나도 별장을 짓기 시작했다. 너른 바다가 보이고 각국에서 배들이 몰려드는 이곳이야말로 새 희망이 시작되는 곳이었으리라. 개항기부터 원대한 항해를 꿈꿨던 포부가 이제는 시민들 모두와 함께하게 되었으니 진정한 희망의 시대가 열린 듯했다. ‘인천 시민애집이음 1977’의 창문 너머에는 여전히 인천 앞바다가 푸르게 일렁이고 있었다.

                                                                   2021.07.18 글 그림 박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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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 2021-07-19 09:54:18
두번째 그림에서 벽면을 표현한 붓터치를 보면서 오래전에 서울 봉천동 산꼭대기에서 살았던 그 시절이 훅~ 눈앞을 스쳐갑니다.
인천을 담아주심에 응원을 팍팍~!!!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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