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의 리뷰의 리뷰 - 라스트 오브 어스, THIR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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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의 리뷰의 리뷰 - 라스트 오브 어스, THIRSTY
  • 이권형
  • 승인 2020.06.29 07: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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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칼럼] 게임 '더 라스트 오브 어스'와 음반 'THIRSTY' 리뷰에 대해
- 이권형 / 음악가
콘솔 게임 '더 아스트 오브 어스'
콘솔 게임 '더 라스트 오브 어스'

2013년 발매된 콘솔 게임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캐릭터를 직접 조작한다’라는 게임 매체 특유의 특성을 최대한으로 살린 현실적인 연출과 스토리텔링으로 게임 언론에서 선정하는 ‘그해 최고의 게임’ 최다 선정작을 일컫는 GOTY(Game Of The Year)를 거머쥐며 명작 반열에 올랐다. 게임 리뷰를 집계하는 플랫폼 ‘메타크리틱(Metacritic)’의 2010년대 최고의 게임으로 선정되기도 했을 정도로 게임사에 손꼽히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 후속작이 발매에 앞서 비평가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으며 올해 GOTY는 떼어 놓은 당상 아니냐는 유저들의 반응과 함께 기대를 한껏 모았다. 그리고 드디어 발매된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의 화재성은 역시나 전작의 명성에 버금가는 것 같다. 그런데 이번 신작이 연일 화재가 되는 이유가 좀 유별나다. 앞서 언급한 게임 매체 메타크리틱(Metacritic)에는 비평가 점수와 유저 점수를 따로 집계하여 표기되는데,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에 대한 집계를 보면, ‘비평가 점수 94/100점, 유저 점수 4.6/10점’(2020년 6월 27일 기준)으로 비평가 리뷰에선 만점에 가까운 반면, 유저 점수는 그와 완전히 상반된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는 게임에서만 가능한 획기적이고 도전적인 이야기”, “플레이어와 게임 주인공 사이에는 다른 매체에선 불가능한 특별한 공감이 있다” 등, 주요 언론 매체들의 상찬이 이어졌으나 게임을 플레이한 유저들은, 각자 감흥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극찬에 가까운 비평에 대해선 마치 결의라도 한 듯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아무리 언론의 비평과 유저 간의 온도 차가 존재할 수 있다 한들 어떻게 이렇게나 다를 수 있는지, 그에 대한 분석과 제작진의 해명 또한 연일 이어지고 있다.

올해 초, 구체적인 양상은 다르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이와 비슷하게 논란이 된 사건이 하나 있었다. 17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 '최우수 모던록 음반' 수상 결과와 함께 공개된 선정위원 김성대의 선정의 변 내용이 그것이다. 그는 ‘검정치마’의 음반 ‘THIRSTY’에게 돌아간 수상 결과에 “'최우수 모던록 음반'이라는 결과는 (...) 곡과 곡 사이 맥락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작품을 비난한 모든 이들에게 날리는 시원한 어퍼컷이다.”라는 내용의 선정의 변을 내놓았고 이에 대한 논란 또한 이어졌다.

'검정치마'의 음반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
'검정치마'의 음반 ‘THIRSTY'

사실, 앞서 언급한 두 결과물('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 ‘THIRSTY’)을 직접 플레이해보거나,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본 지면을 통해 그 자세한 내용에 대해 논의할 생각 또한 없다. 예를 들어,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의 게임 플레이나 스토리텔링 연출이 왜 문제적인지, 검정치마 음반의 어떤 부분이 특출나고 어떤 내용에서 논란이 비롯되는 것인지 구체적인 논점을 짚을 생각은 없다는 말이다. 다만, 과연 작금의 현상들이 비평가들이 입을 모아 극찬한 “획기적이고 도전적인 이야기”나 그에 버금가는 아티스트의 ‘도전적인 시도’를 그저 대중들이 이해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일인지, 그때 그 어퍼컷의 기원이 대체 어디인지 따위를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야흐로 ‘취향 존중’이 미덕으로 일컬어지는 시대이다. 각자의 취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명하고, 수많은 취향과 미적 판단의 범람은 언제나 익숙하다. 무엇이 훌륭한 게임이고, 무엇이 훌륭한 음악 또는 음반인지, 심지어는 올바른 예술이란 무엇인지 판단하고, 부정하고, 병도 주고, 약도 주고, 상도 주고, 허공에 어퍼컷이 날아다니기도 하는 그런 시대인 것이다.

한 유튜버는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 유저 평점 폭탄 사태를 다루면서 "요즘은 게임 리뷰보다도 게임 스트리머의 반응이 더 권위를 얻는 것 같기도 합니다."라고 덧붙이며 게임 저널리즘을 비판했다. 요즘은 수많은 정보와 취향을 소화하기 좋게 씹혀서 널리 공개하는 일이 흔하다. 비평가들의 미적 판단 역시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리뷰의 대상이 된다. 심지어는 그 리뷰가 리뷰되는 일도 드물지 않은, 리뷰의 홍수 속에서 우리의 취향은 그사이 어디쯤을 떠도는 신세로 남겨진다.

철학자 조르주 아감벤의 미학 저서 ‘내용없는 인간’에는 이런 예언이 있다.

“비평적인 의식은 어찌 되었든 일시적인 쇠퇴를 겪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 쇠퇴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 우리는 몇 가지 가정을 내세울 수 있을 뿐이다. 이들 중에 하나는 (물론 이것이 가장 암울한 가정은 아니다) 우리가 바로 지금 있는 힘을 다해 미적 판단의 근원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예술이라는 개념은 어느새 사라지고, 아울러 새로운 개념이 만족스럽게 그 자리를 차지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저 하나의 가정 위에 세워진 예언 글에 묘하게 간담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혼자만 받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작금의 현상들을 통해 우리 스스로의 미적 판단의 근거가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그것이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인지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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