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지, 존재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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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지, 존재의 이유
  • 이김건우
  • 승인 2020.03.30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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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칼럼] 이김건우 / 서울시립대 교지 편집장

 

지금까지의 대학생활의 거의 전부였던 편집실을 떠난다. 내게 편집실은 애증, 사실 증이 더 큰 공간일 수밖에 없다. 마감의 고통은 물론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고민을 안겨주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행사 기획안을 쓰고, 신간 기획 회의를 준비하고, 교지에 실릴 기사를 쓰고, 기사를 모은 다음 편집을 하고… 편집부원들 하나둘씩 자리를 뜨고 새벽에 홀로 앉아 있다 보면 괜한 잡념이 앞선다. ‘우리가 사라진들 누가 알아주기나 할까?’ 당장 닥친 일을 해치우는데는 쓸데없는 생각들 말이다. 편집실에서 새벽을 지새우면서 항상 우리의 존재 의의를 찾기 일쑤였다.

관성으로 연명하는 교지

교지는 왜 존재하는가? 어느 날, 고민에 잠겨 옛 교지를 들춰보다 한 선배가 남긴 글이 보였다. 그 선배는 “교지는 지금까지 있어왔기 때문에 있을 뿐”이라 말했다. 자신도 똑같이 편집실에서 밤을 지새우며 고민해봤지만 '교지는 과거의 학생운동, 학생자치의 관성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라 부연하였다. 절망스러웠다. 내가 사랑하는 이 조직은 이제 존재할 이유가 없는가? 관성마저 사라지면 이 조직은 머지않아 사라질 것인가? 나는 스스로 이 질문에 아니라고 답하고 싶었다.

학생회가 나날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지만 학생회는 여전히 없으면 불편한 곳이다. 학생 사회가 ‘사회’라고 불릴 수 없을 정도로 파편화되었다고 하더라도 대학당국에 의견을 집단적으로 전달할 창구는 여전히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회는 의견을 모으는 창구와 복지사업기구 정도로라도 그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지와 성격이 비슷한 학보사를 비롯한 타 대학언론은 어떠한가? 대학언론 역시 구독률이 나날이 떨어져가고 있다지만 이 역시 없으면 불편하다. 학교별 인터넷 커뮤니티보다 정보전달이 느리더라도 대학언론은 ‘오피셜’, 검증된 정보를 아카이빙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교지는? 학교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대개 많은 경우에서 교지는 대학당국과는 독립된 ‘학생자치언론’이다. 대학언론이 찍어내야 할 오피셜은 이미 학보사와 방송국이 하고 있다. 그러면 교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과거 많은 학교에서 교지는 학생운동의 선전 역할을 맡아왔다. 그런데 대학사회에서 학생운동이 힘을 잃어가면서 선출직 학생회는 빠르게 정치적 색채를 잃어갔다. 반면 선출되지 않는 자발적인 모임인 교지는 정치적 색채를 잃더라도 학생회보다는 그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물론 어느 학교 교지는 그 정치적 색채를 완전히 잃어 『대학내일』 00대판과 같은 성격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대학에서 교지는 학생운동의 관성에 따라 그 논조가 진보적이다. 이 경우 학생운동이라는 몸은 사라졌는데 교지라는 입만 남아있는 셈이다. 그래서 많은 학교에서 교지는 의견이 갈리는 학내외 현안에 기계적 중립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학내 공식기구, ‘편향적인’ 비평을 하는 유일한 ‘정치적 공간’이 되어 버렸다.

이런 맥락에서 많은 학우들은 교지의 논조를 ‘편향적’이라 비판한다. 하지만 교지는 학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정치적 공간’이라는 점에서 타 대학언론, 학생자치기구, 학교별 인터넷 커뮤니티와 차별화되고 그 존재 가치가 있다. 불편부당한 언론으로써 '오피셜'을 생산하는 역할은 학보사와 방송국이 한다. 교지가 비판적인 관점을 포기하고 학보사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려 한다면 굳이 교지를 따로 챙겨 읽을 이유가 없다. 학내외 사회 현안보다는 문화에 집중한다고 하더라도 교지가 읽힐 이유는 없다. 대학생의 문화나 소위 ‘생활 꿀팁’에 관해서는 『대학내일』이나 학교 인터넷 커뮤니티가 더 양질의 정보와 비평을 제공하고 있다. 교지는 불편부당한 언론과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가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그나마 읽히는 것이다.

진보시대를 여는 실천의 활자

우리 학교 교지가 창간할 적 슬로건은 '진보시대를 여는 실천의 활자'였다. 이 슬로건이 주는 메시지는 지금도 유효하다. 교지는 '편향적'으로 비평하는 입을 넘어서 실천하는 몸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교지의 비평에 공감하여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 사람들이 없다면 비평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운동권이 활개하던 과거라면 모를까 이 이슈를 받아 싸울 세력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면 교지는 메시지 발신을 넘어 이 운동을 직접 이끌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작은 변화를 얻어내 학우들에게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입증해야 한다. 이제 교지는 그렇게 연명해야 한다.

혹자는 또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운동권이 사라진 이유는 학내 운동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지 않겠냐고. 하지만 난 여전히 학내운동, 아니 삶을 조금이나마 공유하는 모든 공동체에서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학 학생사회가 아무리 파편화되었다고 하지만 많은 학생들은 여전히 한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이유로 삶을 공유하고, 또 비슷한 문제로 부당함을 느낀다. 부당한 것들을 바꾸기 위해서라면 여전히 운동은 필요하다.

그렇다면 교지는 어떤 운동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각 학교에서 교지를 하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는 운동을 하면 된다. 그것이 대학생 학습권일 수 있고, 페미니즘일 수 있고, 장애인권일 수 있고, 학내노동자와의 노학연대일 수 있고 다양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중에서 학생자치의 이론적 토대를 연구하고 학우들과 함께 더 좋은 학생자치를 토론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편집장으로 있던 교지 『시대문화』는 학생자치 특집호를 내고 각 단위 학생회, 여러 학내 소모임을 만나 학생사회의 의결구조를 어떻게 개선시킬 수 있을지 논의하는 자리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앞서 거창하게 이야기한 ‘교지가 하는 운동’과는 다르게 『시대문화』의 행보가 소박해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개별 이슈에 관해 비평하고 행동하는 일만큼이나 각 이슈들이 의결구조에 올라와 다뤄지는 과정이 올바른지 토론하는 일도 중요하다. 중앙정치를 떠올려보자. 전사회적 의결구조를 이론적으로 고민하고, 이 고민을 바탕으로 제도를 개선하는 정치적 행동은 당연히 중요하다. 이처럼 대학에서도 학생사회의 의결 구조를 이론적으로 고민하고, 이 고민을 모든 학우가 나눠야만 학생의 권익이 더 증대될 수 있다. 특히 소수자의 의견이 공동체에서 더 강하게 대변되기 위해서 이 작업은 필수적이다. 가령, 학내 페미니즘 운동이 말하는 총여학생회 재건 역시 이러한 고민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듯이 말이다.

편집실을 떠나며

편집실을 떠난다. 마냥 좋았다고 할 순 없다. 항상 존재하는 이유를 의심받는 교지의 편집장을 맡는 일은 생각보다 더 버거웠다. 하지만 교지를 사랑했기 때문에 교지는 왜 존재하고, 어떻게 해야 읽힐지 임기 내내 고민했다. 고민의 최종판을 이 칼럼으로 옮겼고, 지금 당장은 스스로 봐도 나름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먼 훗날 이 칼럼을 되돌아볼 때도 이 칼럼이 타당해보일지 궁금하다. 여전히 교지를 향한 애정이 이성을 앞서기 때문에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때 이 고민의 결과가 틀려 보인다면, 이 칼럼은 교지를 향한 애증으로 인해 판단력을 잃은 편집장의 못난 글일 것이다. 앞으로 『시대문화』를 이끌 편집부원들, 나처럼 교지가 왜 존재하는지 밤새 의문을 던질 전국의 대학 교지 편집부원들은 이 글이 타당한지, 부당한지 좀 더 빨리 알아차리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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