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 삶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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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 삶을 만나다
  • 은옥주
  • 승인 2020.01.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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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감사한 제주도 기행 - 은옥주 / 공감심리상담연구소 소장

 

 

아무데도 가고 싶지 않고, 보고 싶은 곳도 없었다.

제주에 와서 3일 동안 꼬박꼬박 먹고 자고 그리고 애월읍의 아름다운 바다를 보며 구불구불한 해안 길을 걸었다.

걷다가 지칠 때쯤 조그만 식당에서 생선조림을 먹고 바다가 보이는 찻집에 앉아 정경혜 시인의 시를 읽었다

 

 

 

 

 

 

 

 

 

 

 

 

 

 

 

마음이 많이 쉬었는지 시어들이 살아 움직이며 가슴을 파고 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참을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밤이 되면 숙소 앞 찻집에서 밤바다를 보며 그냥 있었다.

 

여행 3일째 되는 날 버스를 타고 싶어졌다.

버스정류장까지 천천히 걸어 무작정 첫 번째 오는 버스를 탔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는 몰라도 끝까지 가다가 되돌아올 작정이었다.

옆자리에 연세 지긋한 할머니 한분이 앉았다.

 

그분은 제주 5일장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마침 장날이 궁금해져서 같이 내렸다.

꼿꼿이 서서 걷기도 힘든 할머니는 조금 걷다 쉬고 허리가 몹시 아프다며 걷는 것을 힘들어했다.

 

몸이 아프지만 외지에서 자녀들이 다 설을 쇠러 오기 때문에 장이라도 봐두려고 한다고 했다. 나는 바쁜 일이 없으니 시장 구경도 할겸 물건도 들어드리고 같이 동행하기로 했다.

 

 

 

 

 

 

 

 

우선 제사상에 필요한 동태전과 장어를 어물전에서 샀다.

보리쌀도 한 됫박 사고 나물거리도 사고 이것저것 살 때마다 할머니는 허릿 춤에 꼬깃꼬깃한 돈을 끄집어 내셨다.

산 물건을 들고 따라 다니는 나에게 몹시 미안해했지만 안심이 되기도 한 듯 했다.

 

그녀는 두런두런 자신의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84세가 된 그녀는 50년 전에 서울에서 제주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22녀를 다 서울에 유학 시키느라 그때부터 미싱으로 밀감 딸 때 쓰는 모자를 만들어 팔았다고 했다.

그 일은 이제 능숙해서 지금도 하고 있고 이제는 도매로 내기 때문에 꽤 수입이 많아져서 손주들 용돈도 두둑히 줄 수 있어 감사해했다.

자식들 중 특히 일산에 사는 막내딸은 공무원이고 아주 큰 아파트에서 잘 산다고 하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나왔다.

택시에 짐을 실어주고 배웅하며 그분의 열심히 살아온 삶에 대해 존경심이 생겼다.

5일장은 설 때문이라 물건도 많고 사람도 많았다.

줄서서 따끈한 호떡을 오뎅 국물하고 사서 먹고, 떡볶이와 순대도 먹었다.

 

시장 한 바퀴를 도는데 골목 구석에 할머니 한분이 전복, 소라, 멍게 같은 것을 몇 개 놓고 팔고 있었다. 그 앞에 같이 쪼그리고 앉아 말을 걸었다.

깡마르고 조그만 체구의 그녀는 해녀라고 했다.

지금이 73세인데 아직도 물질을 해서 바다에서 갓 따온 것들을 팔고 있다고 했다.

어디서 이렇게 강한 생명력이 생겼을까? 감동이 되었다.

그녀는 아직도 물질을 할 수 있어서 보람이 있다고 했다.

소라와 전복 몇 개를 사들고 시장 한 바퀴를 돌다가 맛있어 보이는 쑥떡도 샀다.

풍성한 저녁거리가 마련되었다.

 

다음날은 정류장에서 첫 번째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내려서 마음에 드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또 첫 번째 버스를 탔다. 신기하게도 버스 지나는 길에 빛의 벙커라는 전시관에서 고흐와 고갱의 아트 전시회가 있는 것을 보았다.

화려한 빛의 잔치에 내가 고흐와 고갱의 작품의 한 부분이 된 듯 마음이 벅차고 뿌듯했다. 나는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아 전시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고흐와 고갱의 범상치 않은 삶의 우여곡절이 마음을 두드렸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참 행복했다.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 늘 가던 찻집에 앉아 밤바다를 보며 차를 마시는 시간이 편안하고 좋았다.

 

길 위에서 다른 이의 삶을 만나고 그 삶이 나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삶을 만나는 여정을 놀멍쉬멍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푹 쉬게 해준 신비의 섬 제주가 감사하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살아있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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