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칼럼] 음악가의 양심적 병역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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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칼럼] 음악가의 양심적 병역거부
  • 이권형
  • 승인 2019.12.3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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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형 / 음악가

 

사진은 연합뉴스 캡쳐
사진은 연합뉴스 캡쳐

 

태국에 세번 가봤다. 처음 태국에 간 건 단순히 관광 목적이었고, 그때 태국에 이민 가서 사는 지인을 만났다. 그 이후로 그분을 뵈러 한 번 더 태국으로 출국했고, 나머지 한 번의 태국행은 너무 갑자기 나온 입영 영장 때문에 급하게 병역을 미루기 위한 출국이었다. 당시 나는 남은 음악 작업과 직장 생활을 멈출 생각이 없었으며, 입영일 전에 출국해 3일간 해외에 체류하면 입영일을 미룰 수 있었다.

 

당시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병역 미필자는 단수 여권만 만들 수가 있다는 사실을 먼저 얘기해야겠다. 문제는 내가 칠칠치 못하게 그 사실을 잊고 공항까지 이미 사용한 여권을 들고 갔다는 점이다. 부랴부랴 항공편을 다음날로 미루고서 밤새우다가 아침부터 나올지 아닐지 알 수도 없는 긴급여권을 받으려고 허둥지둥 한 적이 있다.

 

아무튼, 그때 태국에 잘 다녀와서 이듬해 12월로 입영일을 지정했다. 그동안 직장 계속 다니면서, 동료들과 만들기로 약속한 컴필레이션 음반 [인천의 포크]와 정규 1[교회가 있는 풍경]까지 별 탈 없이 발매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2017~2018년에 있었던 일이다.

 

그러다 또다시 영장이 날아왔다. 이번엔 미룰 수도 없었는데, 바뀐 병역법이 적용되면서 연기 조건이 강화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군대로 갈 생각은 없었다. 병역거부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다.

 

20대 초반에는 군대 언제 가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대답하기 피곤한 질문이므로 대충 둘러대서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정말 집요한 사람이 있으면 병역거부 할 거라고 그냥 솔직하게 응수했다. 그럼 그때부터 대의명분을 요구받기 시작하는데, 나는 특별한 설명을 하려고 하진 않았다. 내가 병역거부 하는 이유는 종교적인 것도, 거창한 신념이 있어서도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적 사유 이외의 이유로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된 다른 이들 역시 일상적으로 겪는 헤프닝일 것이다.

 

그러다 막상 실제로 병역거부를 하려니 부담도 컸다. 재판에 넘겨질 것이고, 아마 16개월형을 선고받으면 실형을 살다 나올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자고 일어나보니 내용의 문자가 몇 개 와있었다. 공통적인 내용은 다행이다였다.

 

SNS에도 뉴스가 쏟아져서 보니 병역법 조항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에 대한 내용이었다. 구체적인 내용이 파악이 안 되고 정신이 없었는데, 급하게 소식을 듣고 평화주의 단체 전쟁 없는 세상집회 현장을 찾아갔다. 평화주의 활동가들과 비종교적 사유의 양심적 병역거부자 분들이 모여있었고, 헌재 판결에 대해 기념할 부분과 아쉬운 점을 얘기하는 자리가 이어졌다. 뭔가 변했다는 게 조금은 실감 났다. 그날의 결정으로 당장 각오하고 있었던 재판과 수감생활은 보류된 것이다. 201912월을 기한으로 둔 대체복무역을 포함한 병역법 개정이 확정될 때까지는.

 

그리고 이제 201912월이다. 그날 이후, 나는 행정상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일단인정받아 대체복무역 심사 대기 상태로 지냈다. 내가 아는 주변 병역거부자 중에는 심사 대기까지 인정 못 받는 경우도 많았다. 나는 언론 기사나 음반 등 음악 활동을 하면서 남은 기록들이 유효하게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행정적 불편함이 스트레스였는데, 이제 전보다는 무던하게 넘긴다. 몇 년 전처럼 군대 어떡할 거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별로 없고, 다니는 직장이나 음악 작업도 문제없다. 누군가 병역거부에 대한 명분을 물으면 괜히 조급해서 거창하게 얘기하곤 했는데, 이제 주저 없이 지금의 일상을 지키는 것이 소중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감사하게도 내 신념과 태도를 받아들여 주는 이들이 주변에 많아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지난 27일 기한을 4일 남겨두고 대체복무역을 포함한 병역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대체복무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징벌적 성격의 내용이라는 비판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동안 19000여 명이 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감옥살이를 하고서야 찾아온 소중한 변화가 아닌가. 게다가 이날은 만 18세로 선거권 연령 하향된 공직선거법 개정안도 통과된 날이다. 세상은 조금씩이지만 변하고 있다.

 

이제 올해가 지나고 나면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될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아무튼, 가능한 나는 계속 노동하고, 동료들과 함께 열심히 다음 음반을 준비할 생각이다. 지금껏 그랬듯이, 더 나은 음악을 꿈꾸다 보면 더 나은 세계에 살고 있지 않을까. 좋은 음악을 꿈꾸는 일과 좋은 세계를 꿈꾸는 일이 나로서는 다른 말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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