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칼럼] 청년들의 최소가치, 최저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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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칼럼] 청년들의 최소가치, 최저임금
  • 안정환
  • 승인 2019.12.23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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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환 / 연세대 의공학부
2020년 적용 최저임금안 투표 결과

 

 

내년부터 최저임금이 인상된다고 한다. 현 정부 들어서 매년 오르던 최저임금은 시작부터 잡음이 끊이지 않았는데 돌이켜보면 크게 오르던 적게 오르던 인상율과는 관계없이 최저임금이라는 단어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

 

기사가 나오면 어김없이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전문가들의 견해가 쏟아져 나왔고 이에 뒤질세라 긍정적인 사례와 부정적인 사례도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한다. 소위 전문가가의 소견과 사례는 첨예하게 대립하는 최저임금 토론에 열기를 키워주었으나 여기에 정치를 더하자 이념 싸움으로 번져가는 꼴이 되어버렸다.

 

출처도 인증받지 않은 패널(그들은 과연 저 서늘하고 음습한 최저임금이라는 울타리에 한번이라도 들어와 본적이 있을까 싶을 사회 저명인사들)들의 열띤 주장을 보며 누군가는 예전부터 많이 보았던 뻔한 레퍼토리라며 혀를 찼고, 누군가는 토론의 주제가 일보 전진도 없이 원점으로 돌아왔다며 관심을 껐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최저임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근무할 청년들의 최소가치의 기준이고 못해도 30년 이상 더 사회에서 뛰어야 할 우리들에게 양보할 수 없는 협상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흡사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와 닮아 보인다. 서민들은 물가 상승률과 화폐가치의 불균등에 정부를 향해 불편을 토로하고 자영업자들은 최저임금을 두고 노동자들과 끊임없이 눈치싸움을 하며 기업의 얄짤없는 수수료에 등골이 꺾인다. 기업은 원가 부담과 고용 인원 등의 경영 부담으로 서민들의 생계를 압박하고 정부는 그런 기업을 다시 압박한다.

 

어느 부분에 초점을 맞춰도 원인의 원인이지만 진정한 원인은 될 수 없는 아이러니다. 닭과 알에 대한 논제는 알의 DNA와 진화유전학의 법칙을 근거로 알이 원인이다라고 밝혀졌지만, 최저임금을 둘러싼 논쟁에서는 제도의 문제인지 구조의 문제인지 쉽게 맥이 집히지 않아 답답할 따름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부의 격차를 가늠 짓는 최저임금이라는 화두에서 우리는 도망치지 말고 끝까지 고뇌해야 한다.

 

물론 우리들 스스로의 최저임금의 값어치를 높이는 방법은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학교를 가지 않은 청년들에게는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기술과 숙련도가 높은 기술, 외국어 능력을 갖추는 것들이 있고,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은 대학의 성적과 직무에 관련된 경험, 활동, 실적 등을 쌓고 외국어 능력도 겸비해야 한다는 것쯤은 대한민국 청년 누구라도 알고 있다.

 

그러나 요즘은 이마저도 에 달렸다고 한다. 기업들이 원하는 인재상은 다양하나 많은 공통분모가 존재해 획일화되는 스펙 싸움에서 더욱더 새로운 걸 찾아야 하고 실낱같은 기회도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학력의 차이는 외부 활동과 실적으로, 부실한 스펙은 직무에 관련된 전문성으로 채움으로써 비등해지는 싸움에 끝내 우리는 에 기대어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취업 성공한 사례들은 많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지난한 시간들 속에서 흘린 노력과 땀과 ~~에 할 말을 주저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만한 준비성과 철저함에 걸 맞는 보상이라는 것을 내심 인정하게 된다. 이와 비슷하지만 스펙에 올인했어도 미세한 차이로 낙방한 이에게 노력실력의 부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눈물겹도록 피나는 노력으로 달려왔어도 한 줄의 스펙에서 낙방했다면 이들의 노력에는 무슨 말로 위로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단지 에 기대어 본다면 너무 잔인하다. 이것이 우리 스스로가 처한 상황의 불리함을 깨닫고 목소리를 내야만 하는 이유다.

 

에둘러 잘 살아보자는 희망 앞에 우리의 최소가치를 높이려는 노력과 소망은 조금은 이루어졌으나 결국은 돌고 돌아 링반데룽이 되고 말았다. 시급은 올라갔지만 물가도 올라가 어찌 보면 제자리걸음과 같아진 꼴이다. 이유 불문 최저시급때문에 경제가 망가지고 중소기업이 무너지고, 자영업자가 망해간다는 논리는 젊은 청춘들의 열정에 찬물과도 같다. 얽히고 설킨 경제논리에서 아직 세상살이에 익숙하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열정페이만 요구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사회다. 최고시급이 최고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생계시급을 받는 젊은 청춘들은 아직 희망을 꿈꿀 기회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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