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칼럼] 직접 민주주의라는 환상 - 이김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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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칼럼] 직접 민주주의라는 환상 - 이김건우
  • 이김건우
  • 승인 2019.11.25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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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김건우 / 서울시립대 철학과, 교지 편집장

 

 


지난 주 내가 다니는 대학에서 대의원회가 있었다. 이 날 학생총투표 근거조항 신설 등을 골자로 한 학생회칙 개정안이 큰 논쟁거리였다. 나는 학생총투표의 역기능을 우려하며 반대 의견을 내었다. 반대했던 나 역시 왜 제안자의 심정에는 동감한다. 전체학생총회를 준비하는데 투여되는 역량은 큰 반면 막상 총회는 잘 성사되지 않는다. 그래서 전체학생총회보다 더 성사될 가능성이 높고 준비 기간도 비교적 짧은 학생총투표를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자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 제안의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개 많은 학교에서 학생사회의 최고 결정권은 전체학생총회에 있다. 그런데 전체학생총회가 단순히 머릿수가 제일 많은 의결기관이라는 이유로 최고 결정권을 갖는 것이 아니다. 전체학생총회가 최고의결기관인 이유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오프라인에서 직접 얼굴을 맞대고 토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학생회칙에 담긴 의결구조에서 제일 중요한 결정은 머릿수 싸움이 아니라 숙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함의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학생총투표가 총회보다는 더 간편할지언정 숙의의 과정이 되기는 힘들다. 그리고 숙의 과정이 없다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최소한 전체학생총회에서는 학생들이 안건에 대한 설명도 듣고 찬반 의견을 고루 들으며 고민할 시간이 ‘강제’된다. 그러나 학생총투표는 이 고민할 시간이 ‘강제’되지 않는다. 학생총투표를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학생들이 개별적으로 고민해서 투표할 수도 있고, 디지털 공간에서 토론이 될 수도 있다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학생사회'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학생사회가 파편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안건에 관해 고민할 시간을 자발적으로 가질까? 또한 디지털 공간에서 토론을 한들 그것이 유의미한 토론이 될 수 있을까? 아니다. 디지털 공간은 유의미한 공론장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집단극화를 불러일으킨다. 이에 관해서는 올해 초 ‘디지털 퍼스트? 대학언론, 미쳤습니까?’라는 칼럼에서 자세히 다룬 적 있다.
 
실제로 작년 굵직한 학생총투표를 경험한 연세대와 성균관대 학생사회는 학생총투표에 관해 재고하고 있다. 연세대는 학생회칙 개정을 통해 학생총투표의 권한이 전체학생총회에 미치지 못하게끔 조정하였다. 또한 성균관대는 ‘도전학기제’에 관해 학생의 총의를 묻는 방법으로 학생총투표가 아니라 전체학생총회를 택하였다. 두 학교 모두 조금 번거롭더라도 전체학생총회가 학생들에게 토론의 시간을 확실히 보장한다는 생각으로 이와 같은 결정을 한 것이다.
 
학생총투표처럼 더 간편하면서도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한 요구는 비단 대학 안에서만 있지 않다. 정치혐오가 팽배한 상황에서 모든 시민이 정치적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해 최선의 결과를 얻어야 한다는 주장, ‘직접 민주주의론’ 또는 ‘시민정치론’은 지속적으로 큰 호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는 직접 민주주의라는 환상과 이어져 있다. 직접 민주주의 옹호자들은 대의제는 필요악이고 이제 디지털 기술을 통해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대의제는 필요악이 아니라 최선이기 때문에 채택된 시스템이다. 그들의 이상인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경제 활동을 하지 않고 공적 고민을 할 여유가 충분히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공적 고민을 충분히 할 여유가 없다. 여유가 없기 때문에 직접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사려 깊은 숙의보다는 고민 없는 간편한 결정이 더 대두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직접 민주주의는 오히려 소수자의 존재를 지우고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결정을 내린다.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와 미국의 트럼프 현상이 그 예다.
 
공적 고민을 나눌 여유가 없고 정치적 조직이 약한 상황에서 직접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을 지금보다 더 나쁜 결정으로 이끈다. 또한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보장되더라도 모든 사람이 고도의 정무적 판단을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선의 대안은 올바르게 작동되는 대의제다. 물론 지금의 한국사회는 선출된 정치 엘리트가 민의를 제대로 대변하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의제와 정치 엘리트의 역할을 완전히 부정하기보다 대의제가 어떻게 잘 굴러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최근 국회 본회의 상정을 앞두고 있는 선거제도 개혁안이 그 고민의 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골자로 하는 선거제도 개혁안은 올바르게 작동하는 대의제를 목표로 한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는 집단이 정당을 이루고, 해당 정당의 정치 엘리트가 의회로 진출해서 다른 정당과 선의의 경쟁을 하는 대의제. 그리고 이 정치 엘리트가 정당의 기층당원에게 수시로 피드백을 받는 당내 민주주의. 이 두 축이 견고해진다면 불안정한 직접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내가 다니는 학교, 한국사회 모두 민주주의 시스템을 바꿀 중대한 결정을 마주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구성원이 민주주의에 관해 고민하고 토론할 때에만 민주주의일 수 있다. 미국의 작가 E.B. 화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민주주의는 ‘국민 절반 이상이 절반 이상의 경우에서 옳다는 생각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다. 민주주의는 ‘아직 반증되지 않은 이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지침’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민주주의가 모두를 잘못된 결정에 빠뜨리지 않는 시스템이기 위해서 더 많이 토론해야 한다. 구성원들의 관심과 토론이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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