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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동훈
  • 승인 2019.11.05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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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엄동훈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반

 

아내는 결혼 후 일면식도 없는 나의 조상님을 모시기 위해 사십여년 상차림의 일을 힘든 내색 없이 해왔다. 하지만 올 추석명절은 다르다. 왜소한 체격임에도 야무지고 당찼던 그 사람이 이번엔 세월의 무게에 어쩔 수 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제사를 모신 후 인사차 누님 집으로 해서 두어 곳을 다녀와서는 소금에 절인 파김치처럼 얼굴이 창백해졌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피곤의 수렁에 빠진다. 천근만근의 몸이 심연 속으로 빨려든 것인지 꿈속에서 악귀라도 만났는지? 끙~ 끄응~ 소리를 낸다. 혹시 깰까 싶어 거실에 불 켜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저녁때가 되어 밥 먹자고 깨우기 미안해 좌고우면左顧右眄하다 간편식으로 때운다.
 
자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가을 하늘처럼 말끔하던 아내는 다음날도 여전히 힘들어 한다. 점심상 차리는 것이라도 덜어 주고 싶은 마음에 살며시 자전거를 가지고 나온다.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는 공기압 상태, 구동장치와 제동장치 작동여부를 점검한다. 자전거 전용 길에 들어서면 시속 20키로 미터 이상으로 달리게 되므로 안전을 위해 이모저모 살피는 것이다. 세 가지 항목 외에도 헬멧, 보안경 준비도 해야 한다.
 
오늘은 인천대공원에서 소래습지생태공원까지 달릴 예정이다. 장수천엔 팔뚝만한 잉어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서창2지구 옆을 지나는 길섶에는 때를 놓친 해당화가 성글게 피어 있다. 불그레한 열매도 보인다. 가을 전령사 들국화도 환한 얼굴을 하고, 반갑게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내는 힘들어 하는데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환하기만 하다

소래습지생태공원에는 해수족욕 시설이 있다. 족욕 전후 씻는 장치와 발 건조 장치까지 잘 짜여 있다. 설계자와 관리자의 세심함이 돋보인다. 나도 체험을 해보기 위해 양말을 벗고 정강이 절반 정도 잠기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로 옆자리에 계신분이 “이 자리가 좋은 자리입니다.” 한다. 물속에 손목 굵기에 어른어른 보이는 배관에서 덥혀진 해수가 연신 쏟아진다.
 
어르신은 자기소개를 한다. 나이는 팔십 오세이고, 황해도 옹진에서 피란을 와 뱃일을 하였다고 하신다. 통일이 되어 고향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그분은 애잔하게 살아온 삶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속을 보니 발 하나가 없다. 못 볼 것을 본 듯한 당혹감을 감추려고 얼굴을 돌렸지만, 나의 어설픈 행동을 이내 알아 챈 모양이다. 그는 발이 불편하여 매일 온다는 이야기를 한다. 잠깐 동안의 만남인데 씁쓸함 보다 안쓰러운 마음이 전해진다. 그 분의 삶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안고 자리를 뜬다.
엷은 구름이 흐르는 하늘인데 거실거실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날씨가 싱숭생숭하다. 생산을 멈춘 지 오래된 염전 사이로 갈대가 마구 일렁이더니 이내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돌아오는 길은 남동체육관과 매소홀터널을 지나 모래내시장쪽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얼굴에 빗물이 와 닿는 느낌이 여느 때와 다르게 서늘하다 아내를 향한 미안하고, 안쓰러운 감정에서 오는 느낌 아닐까……
 
방풍림으로 조성된 소나무들이 보안경 너머에서 살같이 지나간다. 흑발 머리에서 반백의 머리로 변해가는 모습의 그 사람도 스쳐 간다. 가슴 끝이 아파온다. 바람에 스치는 빗물인지? 울컥 소리를 내며 목안으로 넘어가는 무엇이 있다. 내친김에 하늘에 계신 조상님께 마음속에 있던 이야기를 한다. “다음 제사부터는 상차림을 줄여도 섭섭해 하지 마세요”
 
그 사람은 여전히 쇼파에 누어있다. “밖에는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네요. 쌀쌀해도 청량함으로 한껏 생기가 도네요…… 힘을 내요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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