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뜯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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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뜯다
  • 설태수
  • 승인 2019.10.31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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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뜯다 - 설태수

 

 

       그림자를 뜯다
                      - 설 태 수

 
광활한 벌판과 구릉에 방목된
 
소 몇 마리.
 
땡볕 아래 그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뜯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를 뜯고 있었다.


몽골 초원을 달려본 사람은 안다 너른 벌판과 구릉에 펼쳐진 하늘과 구름이 얼마나 파랗고 명랑한지. 그 위를 불어가는 바람이 얼마나 산뜻한지. 선인장 가시에 맺힌 빗방울이 얼마나 영롱한지.
 
시인은 문명의 도시를 벗어나 이런 대자연에 발을 딛었다. 그런데 그 때 그가 대면하는 것은 땡볕 아래 풀을 뜯는 소 몇 마리이다. 시인은 그 소들이 뜯고 있는 것을 풀이라고 하지 않고 그림자라고 말한다. 소가 자신의 그림자를 뜯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도 검은 그림자를 뜯고 있다고 말한다. 땡볕 아래 풀을 뜯는 소. 그 소가 뜯고 있는 그림자를 보자 시인은 그동안 자신이 잊고 살았던 또 다른 이면인 자기의 그림자를 보게 된 것일까.
 
그것은 ‘소’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시인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행위이기도 하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겉면으로 드러나는 외양이 있고 그 외양에 비춰지는 그림자가 있다. 인생도 삶도 마찬가지다. 보여지는 앞면이 있다면 보이지 않는 배면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보여지는 것만 전부라고 믿고 산다. 숨 쉴 틈 없이 돌아가는 현실에서 벗어나 광활한 대지에 서 있는 시인은 자신의 이면과 조우한다.
 
소들은 일상을 살면서 그림자를 뜯고 있다. 고통의 느낌이 적체될 겨를이 없다. 그러하기에 소들은 늘 광활한 벌판에 방목된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그림자를 의식하지 못하고 산다. 그림자 속에 봉인된 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나날이 시드는 일상을 내다버릴 겨를이 없다.
 
학교와 문화회관에서 글쓰기 수업을 하다보면 처음 글을 쓰는 학우들이 선뜻 글을 내지 않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들은 남들 앞에서 옷을 벗는 느낌이라 쓰지 못하겠다고 한다. 어쩌다 처음 글을 써내는 사람 중에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다. 그동안 버리지 못하고 가슴 깊숙이 묻혀둔 감정들이 몸을 빠져 나오는 과정에서 눈물샘을 건드린 것이다. 그런 과정을 밟은 다음에야 가슴이 시원하다고 말한다. 이 시점에서 그들은 글을 쓰기 시작한다.
 
심리 치료사 프로이드는 환자들에게 이야기를 하라고 권했다. 그들은 쭈볏쭈볏 망설이다 결국은 자신의 해묵은 이야기를 시작하였고 이야기를 다 들은 프로이드는 “이제 되었으니 가 보라”고 간단히 말한다. 이제 곧 치료가 시작될 거라고 생각한 환자가 어리둥절해 할 때 프로이드는 “그대 가슴에 있던 병이 밖으로 다 나왔으니 치료가 끝났다”고 말한다.
 
시인이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이방의 세계에 섰을 때 바라보는 자기의 그림자. 그 검은 그림자를 뜯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할까? 뜯어내면 그 속에서 쏟아져 나올 것은 또 무엇인가. 판도라의 상자처럼 그동안 가슴에 봉인된 슬픔, 분노, 고통, 쓸쓸함이 아닐까. 끝없이 그의 폐허가 나온 뒤에야 비로소 펼쳐지는 청명하고 광활한 벌판. 그것은 그가 새롭게 여행할 여여한 세상 아니겠는가.

 


시인 정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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