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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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 최원영
  • 승인 2019.08.18 2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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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시계추와 같은 삶





풍경 #119.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은 말했습니다. “세상사는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다” 라고요.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한 순간은 몹시 기쁜 일에 취해 즐거워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괴로운 일을 마주합니다. 잠시 동안은 성공에 취해 자존감이 높아져 무슨 일을 해도 성공할 수 있다고 여기다가도 어느 날에는 실패의 흔적에 주저앉아 절망하곤 합니다. 누구나 성공만 하고 싶고 누구나 기쁜 일만 있었으면 하고 기대하지만 이것은 환상입니다. 실제의 삶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이것이 삶입니다. 그래서 삶은 ‘시계추’와 같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계추는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움직여갑니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갑니다. 한쪽 끝에 올라갔을 때는 반대쪽 끝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마치 사랑에 깊이 빠져 있을 때는 이 행복감이 영원할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그 사람이 어느날에는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사업이 잘 되어 새로 내놓는 상품마다 잘 팔릴 때는 자신의 기업이 도산할 수도 있다는 절망적 상황을 상상조차 못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가 몹시 미울 때는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여기게 되고, 사업이 실패했을 때는 자신의 인생은 이제 완전히 끝났다고 여기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기쁨에서 슬픔으로, 그리고 다시 기쁨으로 끊임없이 반복하는 시계추의 운동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괴로움을 느낄 때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내가 절반의 삶 만을 추구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보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기쁨, 사랑, 행복, 성공 등 삶의 절반 만을 자신의 온전한 삶이어야 한다고 착각한 탓에 그것들의 반대편에 있는 슬픔, 증오, 불행, 실패라는 삶의 나머지 절반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괴로운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 말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는 오로지 기쁨과 행복과 같은 긍정적인 일 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슬픔과 불행 같은 부정적인 일도 함께 들어있다는 것을 수긍하는 것이 자신의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삶 자체를 있는 그대로 수긍한다는 것은 어떤 태도를 말하는 걸까요? 좋은 일을 맞이했을 때는 가능한 한 그 기쁨과 즐거움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만끽할 수 있도록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면 됩니다. 나쁜 일을 마주했을 때는 이 일 역시 시간이 흐르면 좋은 쪽으로 바뀔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내가 어떻게 하면 희망이 있는 쪽으로 가능한 한 빨리 옮겨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 되겠지요.

“세상사는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다.” 찰리 채플린의 말이 다시 떠오릅니다. 길을 걸어가는 이름 모를 행인들의 얼굴을 보면 모두가 평온한 얼굴로 보입니다. 그러나 한사람 한사람의 삶을 조금 더 가까이 가서 알아보면 그들 모두 각양각색의 아픔과 슬픔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다만 말하지 않을 뿐이지요.

이게 삶입니다. 이렇게 삶은 기쁨과 슬픔, 기쁨과 아픔, 행복과 불행, 사랑과 미움 등과 같이 극단적인 두 개의 얼굴로 채워져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좋을 때는 나쁜 것이 잠시 숨어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것뿐이고, 누군가를 몹시 미워할 때는 그를 사랑하는 마음 역시 잠시 숨어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 미움이 영원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이지요. 어느 대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 합격했을 때는 무척 기쁠 겁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대학생활 내내 지속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원히 고착되는 것은 없습니다. 젊음도 어느 날부터는 주름살로 가득해질 것이고, 성공했다가도 언젠가는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할 겁니다. 실패 역시도 시간이 지나면 도약의 계기가 되곤 할 겁니다. 마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이는 시계추의 운동처럼 말입니다.

삶이 시계추와 같다는 이치를 받아들이고 나면 그때부터 견뎌내는 힘이 생깁니다. 너무나 힘겨워서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조차도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시계추는 반대편으로 반드시 되돌아갈 테니까요. 그러니 현재의 아픔과 역경을 충분히 견뎌낼 수 있을 겁니다.
 
이제는 조금 알 듯합니다. 희망이나 절망이나, 사랑이나 미움이나, 행복이나 불행이나 그 어떤 것이든 내가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할 나의 삶이었음을 말입니다. 시계추가 왼쪽에 있든 오른쪽에 있든 똑같은 시계추인 것처럼 어쩌면 삶도 왼쪽에 있든 오른쪽에 있든 그것은 나의 삶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처해 있는 힘겨운 상황을 받아들이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놀랍게도 시계추와 같은 우리네 삶은 행복과 기쁨이 존재하는 반대편을 향해 드디어 움직임을 시작할 겁니다.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지혜 중의 하나는 어떤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그 상황을 ‘나’와 ‘너’ 모두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해석’해내는 여유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했느냐가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 상황을 ‘어떻게 해석했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이것은 희망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주어진 삶이 어떠하더라도 그 삶에 아름다운 해석을 담아내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예화가 <언어의 온도>라는 책에 나옵니다.
 
미국에서 어렵사리 학위를 받고 돌아온 고교 선배와 후배가 있었다고 합니다. 후배가 먼저 귀국해서 서울의 4년제 ‘좋은 대학’ 교수가 되었고, 나중에 들어온 선배는 지방의 2년제 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두사람이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취기가 오르자 후배가 말했습니다.

“선배, 그렇게 어렵게 학위를 따서 돌아왔는데 지방대학에 있어서 되겠어?”
그러자 선배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좋은 대학’ 교수해라, 나는 ‘좋은’ 교수할께.”
 
누가 더 행복한 교수일까요? 독자 여러분은 이미 아실 겁니다. ‘좋은 대학’의 교수를 꿈꾸는 후배는 어떤 ‘대학’이냐에 삶의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배는 ‘좋은’이란 말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 대학에서 가르치든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배우는 학생들 역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명문대학에서 가르치는 후배보다 선배야말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성공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누구나 비극과도 같은 아픔을 가슴에 담고 살아갑니다. 선배 역시도 그럴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일에 아름다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선배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어주고 있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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