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간이 4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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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간이 4분처럼
  • 은옥주
  • 승인 2019.06.12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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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은옥주 / 공감심리상담연구소 소장


반가운 손님이 왔다. 중학교 1학년 때 짝꿍으로 만나 긴 세월을 늘 같이한 속정이 깊은 친구다.
우리는 자유공원에 올라 커피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조그만 찻집에 마주 앉았다.
그녀는 20대에 대학을 졸업하고 40여 년간 영어교사로 근무했다.
은퇴 후 지금은 지방에서 조그만 찻집을 운영하며 느리게 사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자연히 그녀의 각별한 커피 사랑 때문에 커피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우리 어릴 때, 커피는 어쩌다 귀한 손님이 오실 때 내놓는 진귀한 음식이었다. 그 당시 양키시장(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것들을 파는 시장)에서나 커피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교사 초년생 때 시골 중학교에서 있었던 일 한 토막이다.
시골에서는 새 학기가 되면 가정형편을 알아보고 아이들을 잘 보살피려는 “가정방문” 제도가 있었다. 처음 부임한 학교는 농어촌지역이라 가정을 찾아가면 학생만 있고 부모님들은 거의 집에 계시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학생과 같이 밭이나 바닷가에서 일하시는 부모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부모님들은 거기까지 찾아온 교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금방 캔 양파나 마늘 혹은 널어 말린 뽀송뽀송한 미역을 둘둘 말아서 주며 표현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마당이 선명하게 싸리 빗자루로 정갈하게 쓸어낸 자국이 있는 조그만 초가집을 방문했다. 학생과 할머니는 맨발로 뛰어 나와 반가이 맞았다.

“아이고 선상님 어서 오시이소”
 
조그만 방안에는 작은 소반이 놓여 있고 소줏잔 하나가 있었다. 할머니가 잠시 후 꽤 큼직한 양은 주전자 하나를 들고 들어오시더니 소줏잔에 갈색물을 한잔 가득 부어 주었다.

“선상님 쭉 드시이소.
맛있습니데이 쭉 드시이소”

할머니의 권유에 따라 커피 한잔을 원샷으로 마셨더니 소줏잔 바닥에는 신기하게도 여자의 누드 사진이 살짝 살짝 보이는 그림이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잔이 비자마자 다시 잔 가득하게 커피를 부어주었고, 잔 바닥에 누드 그림이 보이자 마자 다시 잔이 채워지고... 친구는 그날 밤 잠을 한숨도 못 잤다고 했다. 할머니가 타준 커피 한 주전자를 소주잔으로 다 해 치웠기 때문이었다.

“선상님 쭉 드시이소”
그때의 커피에 얽힌 에피소드로 깔깔거리며 이야기 보따리에 날개가 달렸다.
 
내가 대학 다닐 때 일이다.
친구 중에 세련되고 아주 멋진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미국에 이민을 갔다 왔다고 했다.
어느 날 같이 학교 앞 다방에 가서 차를 시키는데 나는 커피(달달하게 설탕도 프림도 많이 넣은)를 시켰다. 그런데 그녀는 유창한 발음으로 “블랙” 이라고 했다. 나는 무슨 소린지 잘 이해 할 수 없었다. 조금 있다가 그녀의 앞에 새카만 한약 같은 것이 담긴 찻잔이 놓였다. 그녀는 긴 다리를 꼬고 앉아 그것을 조금씩 홀짝 홀짝 음미하며 마셨다. 엄청나게 맛있어 보이기도하고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자기는 절대로 프림과 설탕을 넣은 커피는 안 마신다고 했고 그런 그녀의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미팅 파트너를 만나 첫 데이트를 하던 날 나는 다방에서 살짝 거만한 눈으로 “블랙”하며 주문을 했다. 주문한 새카만 음료가 놓여지고 나는 한 모금 마시고 질겁을 했다. 너무 쓰디 쓰서 속으로 무척 당황했지만 얼른 표정을 바꾸고 그 친구가 했던 것처럼 조금씩 음미하며 멋진 포즈로 블랙커피를 마셨다. 속으로는 죽을 지경이었지만.

그런데 그 남학생은 다음 만남에서는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센스있게 “블랙 하나” “커피 하나요” 하고 주문을 했다. 나는 그 분의 그 센스 때문에 몇 번이나 사약을 마시듯 겉으로는 근사한 포즈로 그 남학생과 헤어질 때까지 “블랙”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미각이 섬세하지 않아 커피 맛을 잘 모르지만 핸드드립으로 콩을 갈아서 걸름 망에 받쳐 향을 음미하며 커피를 마시는 것을 좋아한 적이 있다. 그 조그만 기계가 커피콩을 “딱꿍 딱꿍” 갈아내는 것도 재미있고 그 과정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도 참 좋았었다. 친구들이 놀러오면 의식처럼 커피를 내리며 예쁜 잔에 예쁜 스픈, 특이한 잔 받침을 놓는 이벤트를 했었다.

그 후 결혼을 하고 아이 엄마가 되었을 때 반가운 친구들이 와서 커피를 타서 내 놓았다.
친구들이 깔깔 웃었다.

“니가 우짜다가 이래 됐노” 야야 이 잔은 또 뭣꼬?
“세상에나 세상에나 그래도 찻 숫갈로나 타야지 밥 숫갈로 타는기 어딧노“
“아풀싸”

나는 너무너무 정신이 없어서 폼 잡는 걸 잠깐 잊어 버리고 그만 가장 가까이 있는 밥 숫갈로 머그잔에 커피를 타 “휘휘” 저어 친구들 앞에 대령했던 것이다.
우째 이런 일이....
 
새록새록 이런 저런 일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공유하는 추억이 참 많았다.
옛친구와 나는 커피 한잔을 놓고 4시간을 4분처럼 수다를 떨었다.
이제 그 귀하디 귀하던 커피가 한국에 상륙하고 생활화 되어 곳곳에 카페가 들어서고 매니아 층도 두터워졌다.
4시간이 4분처럼 이야기 꽃을 피우게 해주는 것이 커피의 마력인지 친구의 매력인지 잘 모르겠다.
 
삶의 속도가 빠른 도시에서 늘 전력 질주를 하며 살아오던 나에게는, 자연을 사랑하며 느리게 천천히 살아가는 그녀를 보며 느끼는 감회가 새롭다.
 
심리적 시간의 세계는 물리적 시간 법칙과 달라 행복한 시간은 짧게 느껴지고 지루한 시간은 길게 느껴진다.
시간을 편안히 대하는 내 친구를 보니, 늘 시간에 쫓기는 내 태도를 좀 달리 해 보고 싶어졌다.
“시간 압축 효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한 행복을 준 내 친구가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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