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협력시대 긴 안목으로 준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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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협력시대 긴 안목으로 준비해야"
  • 유봉희 서울대학교 연구교수
  • 승인 2018.10.1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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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철 전 인천대 총장





1945년 을유생(乙酉生)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 넷, 경북 포항이 고향인 홍철(洪哲) 박사는 문경새재로 이름난 문경시 문경읍 주흘산 자락 아래에 터를 잡고 부인과 단 둘이 노년의 삶을 사색하고 있었다. 문경의 진산이기도 한 주흘산은 ‘우두머리 의연한 산’이란 한자 뜻 그대로 문경새재의 주산이다. 서쪽으로 조령천을 사이에 두고 조령산과 마주보며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출발 전 미리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인천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두 시간 반이 지나자 문경의 산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차에 찍힌 주소지를 따라가다 보니 집 어귀에 단구(短軀)의 선비 한 명이 손짓으로 우리 일행을 반겼다. 흰 머릿결에 안경 너머의 고요한 웃음, 영남 유림을 떠올렸는지 오랜만에 옛 선비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선비, 선생, 학자란 말이 나오자 손사래를 치며 그냥 공직자의 길을 걸어왔을 뿐이란다. 그 손짓과 웃음은 겸손했지만 시원했다. 인천에서는 지금도 박사를 ‘홍철 총장’, ‘홍철 원장’이라 호출하고 있다. 인천발전연구원장과 인천대총장을 역임했기 때문이다.

허투루지 않게 집안은 정가롭고 고즈넉했다. 근황을 묻자 “보다시피 절간의 중처럼······.” 꼭 절에 있는 주승(住僧)이어야 하는가,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이란 차이 또한 마음가짐에서 비롯하는 것은 아닐까? 특별한 일이 아니면 바깥 출입을 삼가고 있다 했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문경시의 시장이 자문을 구해도 집을 고수한다니 절간생활이란 것이 그냥 낭어(浪語) 만은 아닌 듯싶었다. 지난 2013년 1월 취임하여 4년의 임기를 채운 대구가톨릭대학 총장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1년 전 이곳 주흘산 자락을 노년의 안식처로 삼았다.

열두 곳 근무 공직생활 마감하고
문경 주흘산 자락에 안식처 마련 
 
쉬고도 싶었을 터다. 박사는 해방둥이다. 해방둥이는 격동기 한국 현대사의 나이테를 그려온 사람들이다. 태어나자마자 해방을 맞고 민족끼리의 전쟁, 학생혁명과 군사쿠테타, 민주화운동, 경제발전까지 격변의 현장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그이의 세대들은 각 처소에서 한국 현대사를 개척했던 인물들이다.
 
박사 또한 다섯 살에 한국전쟁을 겪고 중학교 3학년 때 4·19 혁명을,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5·16 군사쿠테타의 총성을 서울 효자동 하숙집에서 들어야만 했다. 고된 시대였지만 그이들에게는 꿈이 있었다. 배움이었다. 문경새재가 조선시대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꿈꾸며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넘나들던 길이었듯 그 또한 대구를 떠나 서울로 향했다. 고향 포항을 떠나 대구 경북중학교를 마치고 서울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서울살이를 시작한 것이다. 이후 학문과 공직생활은 이어졌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직에 입문해 대통령 경제비서관과 건교부 기획관리실장, 차관보를 역임했다. 청와대 입성은 1983년 아웅산 테러로 희생당한 당시 김재익 경제수석(1938-1983)의 권유가 컸다고 한다. 청와대 입성 후 여섯 명의 경제수석들 아래에서 십년 간 경제정책 입안의 최전선에 있었던 것이다.

 


 

국토개발원장서 인천개발연구원장거쳐 인천대총장 지내
아직도 '홍철 총장'으로 불리는 '영원한 인천인'

동북아의 관문 공항으로 계획한 인천국제공항 건설 프로젝트도 그의 손을 거친 작품 중 하나라 하니, 이미 인천과의 인연은 청와대 시절부터 있었던 터다. 이후 교통안전공단 이사장·국토개발연구원장, 인천개발연구원장, 대구·경북연구원장 등을 거쳤고, 대통령직속 지역발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국토개발연구원장에 봉직할 때 인천 관련 연구 프로젝트를 여섯 개 정도를 수행했다 한다. 홍철 박사와 인천의 인연은 그리 짧지 만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 공직은 대구가톨릭대 총장이었다. 지난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인천대 총장을 지낸 데 이어 10여년 만에 다시 대학 수장이 되었던 것이다.

인천과 인연이 깊다 했지만 다시 물었다. “제가 국토개발연구원장 하다 인천개발연구원장으로 옮겼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격에 안 맞는다고 했는데, 저는 그때 막 개발되던 인천의 가능성을 보고 갔어요. 격을 따지기보다 얼마나 소신껏, 보람되게 일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생각한 거죠.” 그것이 지난 2000년 1월이고, 곧바로 학내 선거를 거쳐 그해 9월 인천대 총장에 취임했다. 올 2월28일 작고한 최기선(1945-2018) 전 시장 시절이었다. 붓(筆)으로 다 쓸 수야 없지만 박사가 추억하는 최기선 전 시장과의 인연과 우정은 퍽이나 깊었던 듯 싶다. 건설교통부 차관보 시절 송도매립지면허를 허가해 준 것도 최기선 전 시장 재임 때였다 한다.

홍철 박사는 평생 열두 번 직장을 옮기면서 일곱 번 기관장을 맡았다. 주로 경제·국토·도시개발 관련 공직이나 연구원이었다. 바야흐로 남북평화무드에 대한 꿈이 한창이다. 남북평화경제란 말도 오름세다. 인천 또한 새로운 ‘환서해 경제벨트 구축’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강화 교동평화산업단지(통일경제특구)·평화고속도로건설(영종-강화-개성·해주)·백령공항건설 등의 구상이 바로 그것이다.
 
일반 시민 입장에서는 어마어마한 구상이라 사실 미덥지도 않거니와 하도 경제특구·공항건설 등의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뜬구름 잡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가질 수도 있을 터다. 인천 서해안 발전 방향과 구체적 실행 파일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 지정학적으로 인천은 어떠한 역할과 전망을 해야 하고 가져야 하는지, 이에 대한 전문가적 의견을 듣고 싶었다.

인천은 하늘길과 바닷길 열려있는 유일한 도시
도시의 가치와 발전 방향 명확한 것이 큰 장점
 
“방향은 맞고 실천해야 한다고 봐요. 문제는 국제 정세입니다. 남북문제는 단순한 한반도에 국한하지 않고 동북아, 나아가 첨예한 국제정세를 함께 포함한다는 측면에서 그리 단순치 만은 않은 것이지요. 준비는 해야 하지만 긴 안목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시 정부를 믿어주어야 합니다.”
 
특히 홍철 박사는 인천광역시의 슬로건(slogan)인 ‘올 웨이즈 인천(all ways Incheon)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 300만 국제도시 인천을 상징할 새로운 도시브랜드(BI·Brand Identity)로 모든 길은 인천으로 통한다는 이 슬로건은 인천의 방향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인천국제공항과 인천항 등의 지리적 여건은 타 도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인천 만의 고유 가치이지요. 2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중국의 급부상이 부담이지만 하늘길, 바닷길이 동시에 열려있는 도시는 인천이 유일합니다. 대구만 해도 시장이 바뀌면 정책이 오락가락합니다. 인천은 다르지 않습니까? 갈 방향이 이미 정해져있기 때문입니다.”
 
홍철 박사의 인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인천 시민으로서 어깨가 조금은 올라가는 느낌이다. 우리는 너무 자학만 하고 살았던 것은 아니까? 박사는 계속 강조했다. “ 우리나라는 조선시대부터 서울을 위해 존재한 나라였습니다. 서울과 대등하거나 닮아간다는 꿈은 현실에 맞지 않습니다. 광역시가 미국의 한 주로 사고하고 그에 기초해 정책을 입안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나름의 길이 있을 뿐이죠. 그런 측면에서 인천은 행복한 도시입니다.”
 
문경 주흘산을 떠나기 전 사인(sign)을 부탁했다. ‘나의 영원한 사랑, 인천광역시 홍 철’ 글쓴이는 경북 문경 주흘산 자락 아래 사는 또 다른 ‘인천인’을 만나고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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