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으로 고립된 인천의 '산업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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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으로 고립된 인천의 '산업단지'
  • 학오름
  • 승인 2017.12.16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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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옥 인천대 사회적경제연구센터 책임연구원


도시는 하나의 형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를 모색하며 성장, 발전, 쇠퇴하고, 다시 순환하며 다양한 형태로 재편된다. 이때 도시는 고속도로, 철도, 항만, 터널, 주택, 산업단지 등 각종 사회기반시설 투자를 지속적으로 증대하고, 이를 성장 수단으로 삼는다. 그러나 사회기반시설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감가되어 새로운 시설들로 대체된다. 한번 건조된 시설물은 고정되어 이동할 수 없는 특성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 조성된 산업단지(부평수출공단, 인천기계공단, 주안공단, 비철금속공단, 남동수출공단 등)가 대표적인 건조물이다.

최근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여 ‘섬’처럼 고립된 산업단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인천의 성장을 주도하고, 수많은 노동자들의 삶의 터였던 산업단지에 대한 이해는 소중한 일이다. 지면의 한계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지만 인천의 수출공단을 재해석하고, 경제자유구역 개발이 인천시민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6년부터 부평수출공단, 인천기계공단, 주안공단 등 7개공단 조성

해방과 전쟁, 그리고 1960년대 정치적 혼란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자립경제 달성과 빈곤으로부터 해방을 최우선으로 하여 자본과 노동을 특정 공간에 집단화하는 수출공단 조성을 산업화 정책의 핵심 전략으로 삼았다. 1964년 구로수출공단에 이어 인천은 1966년 부평수출공단 착공, 1968년 인천기계공단, 주안공단 등 7개 공단이 염전과 농지 등을 매립하여 1970년대 중반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조성하였다. 이후 남동수출공단을 비롯해 2003년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 송도, 영종, 청라를 포함하여 총 13개의 산업단지가 조성되었다. 50여 년간 13개의 산업단지가 개발될 수 있었던 것은 무한대 동원이 가능하고, 값싸게 이용할 수 있는 염전, 갯벌, 농지 등 풍부한 자연자원을 이용하여 도시외곽으로 팽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개발은 국가의 균등발전, 토지의 효율적 이용 등을 이유로 자연자원을 강제 수용하여 이에 의존해 삶을 유지해온 사람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도시는 경제적 의미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세력들이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충돌하고, 갈등하며, 조정과 협상의 수단으로써 거래 또는 투쟁의 대상이 되는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인천수출공단 기공식 관련 신문보도>


이 같은 관점에서 인천의 도시공간에서 산업단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63년 국가가 구로지구와 인천에 수출공단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한 이후 국가와 지역의 다양한 사회세력들, 즉 인천상공회의소, 정치인(특히 유승원, 오학진 등 군부엘리트), 부평지역 지주(금요회, 부평수출공단유치후원회) 등 토착세력과 농민, 서곳지역 주민, 대한염업공사, 염전 노무자, 경기기계공업협동조합, 그리고 대통령, 행정관료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국회의원, 상공계, 지주, 언론, 학계 등 중앙정부 상대로 인천유치 당위성 설명

수출공단의 인천 유치는 단순히 지역의 막연한 기대와 요구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 도심에 산재한 중소공장의 집단화를 통한 비용절감, 지역경제의 기여, 삶의 질 향상 등 강한 기대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수출공단은 애초 재원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착공하여 준공 후 적자 상태를 벗어나기 어려운 구조였다. 국회의원, 상공계, 지주, 언론, 학계 등이 동원되어 대통령, 국회, 상공부 등을 상대로 인천 유치 당위성을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농지 및 염전 매입은 이해관계자들과의 충돌로 사업이 지연되었다. 부지 정지작업 중에는 임금을 제때 지급하지 못해 노동자들의 집단 항의와 작업 중단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수출공단 조성과 운영을 위해 구성된 (사)인천수출산업공단은 재일교포기업 및 중소공장 유치 목표를 달성하고, 기반시설을 구축하는 등 초기 목적을 실현해 나갔다.

                                                 <부평공단 부지 정지작업>

하지만 1971년 군사정권은 비용절감, 효율적 공단 운영 등을 명분으로 정치권력을 동원하여 민간주도로 구성된 (사)인천수출산업공단을 해체하고, 한국수출산업공단에 강제 통합시켰다. 지역사회의 거센 저항과 항의가 있었지만 군부정권의 중앙집권체제에서 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부평수출공단, 주안수출공단, 비철금속공단은 현재 제4,5,6 국가수출공단으로 지정, 통합되었다. 제7 국가수출공단으로 현 인천기계공단을 흡수, 통합하려 했지만 실패하여 인천기계산업단지관리공단이 현재까지 자체 관리, 운영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1960-70년대 고도성장기 산업단지가 국가의 강한 리더쉽이나 행정관료의 합리적 판단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주장은 초기 조성과정을 들여다보면 신화에 불과하다. 산업단지는 국가/지역 단위 다양한 사회세력들의 행위가 반영된 산물이지 특정 인물이나 영웅이 만들어낸 산물이 아닌 것이다.

각종 개발로 도시에서 ‘섬’으로 고립된 산업단지, '새로운 산업공간' 조성에 지혜 모아야  

그러나 50여년이 지난 현재 초기 조성된 산업단지는 각종 개발사업으로 아파트단지에 둘러싸여 ‘섬’으로 고립된 채 위기를 맞고 있다. 산업단지는 사람이 이사하듯 이동할 수 없다. 1980년대까지 인천의 성장을 주도해온 산업단지를 고도화하기 위한 지역사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해법은 보이지 않는다. 첨단산업으로 고도화하고 있는 산업구조에 대응한 인천의 산업화 전략은 투기적 개발사업으로 기존의 산업단지를 ‘애물단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고립된 ‘섬’을 경제자유구역 등 새로운 산업공간과 어떻게 연계할 것인지 지역사회가 지혜를 모아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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