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포동이 날 이 동네 휴머니스트라고 불러주면, 그걸로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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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포동이 날 이 동네 휴머니스트라고 불러주면, 그걸로 된 거야”
  • 배영수 기자
  • 승인 2017.02.13 17:1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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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웃음 신포동에 남기고 간, 인천 1세대 DJ 윤효중씨

신포동 1세대 DJ 윤효중씨가 지난해 11월 인천문화재단 주관으로 음악감상회를 진행하던 당시의 모습. 이는 윤씨의 ‘마지막 공식 활동’이 됐다. ⓒ 인천문화재단

 
지난 11일, 인천의 원조 DJ로 활약했던 윤효중씨가 지병인 암으로 숨졌다. 인천의 원조 팝송 전도사이자, 옛날 인천시청이 중구청 자리에 있던 시절 그 지역의 문화판을 주름잡았던 인물이 눈을 감은 것이다.
 
세상과 이별하기 전 그의 마지막 활동은, 인천문화재단이 지난해 8월부터 11월까지 총 세 차례 진행한 ‘해안동 아틀리에-심지 프로젝트’의 음악감상회였다. 기자도 그 음악감상회에 참석을 했었는데, 사실 그것이 윤씨의 마지막 활동이 될 수도 있겠다는 예상을 했다. 11월 30일 해당 프로젝트의 마지막 음악감상회에 참석한 그는 무척 수척해 보였고, 간혹 힘겨운 모습을 애써 감추기도 했다.
 
당시 인천문화재단 관계자들에따르면 지난해 9월 두 번째 음악감상회 직전 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아 입원했고, 상태가 좋아지지 못해 결국 중환자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었다고 한다. 당시 마지막 음악감상회는 그래서 담당 의사가 “절대 하지 말라”는 것을 윤씨와 문화재단 관계자들이 설득해 이루어졌다.
 
때문에 의사의 조언대로 프로그램 시간을 일부 줄이고, 문화재단 관계자와 앰뷸런스 등이 혹시나 일어날 수 있는 불상사를 감안해 ‘대기조’로 근무하는 조건으로 힘겹게 진행됐다는 게 문화재단 관계자들의 후문.
 
신포동을 자주 다녔던 6070세대의 인천 사람들에게 윤씨는 ‘인천의 원조 음악DJ’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1967년, 당시 아직 개통되지 않았던 동인천역 인근의 제과점 ‘별제과’ 건물 5층에 있던 ‘별음악감상실’의 초대 DJ로 활동했다. 그는 군입대 전인 1971년까지 별음악감상실의 아이콘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
 
별음악감상실 이후로도 그는 신포동 일대에서 음악과 관련된 여러 활동을 해왔다고 한다. 가장 최근의 일은 인천문화재단의 프로젝트 외에 신포동에서 ‘향수’라는 이름의 음악 카페를 별세 직전까지 운영해 왔다. 참고로 그가 DJ를 하던 별음악감상실은 서울의 세시봉, 디쉐네와 같은, 당시 젊은이들이 모여 데이트도 하고 음악도 듣는 명소였다고.
 
비록 80년대로 접어들 즈음 음악감상실 ‘심지’ 등으로 그 명소가 옮겨지지는 했어도, 윤씨가 DJ를 하던 당시의 별음악감상실을 많으면 하루에 1,500명까지 찾은 적도 있었다고. 당시 짜장면 값이 20원이었을 때 40원을 내고 들어갈 수 있었다는 이 곳을, 그렇게 많이 찾아왔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심지프로젝트 음악감상회에 모인 인천시민들. 이들 중 적잖은 수가 윤효중씨의 전성기 시절 활동을 기억하고 있었다. ⓒ인천문화재단

 
실제 기자는 해당 프로그램이 끝난 이후 12월 초 그가 입원했던 병원을 한 차례 찾은 적이 있었다. 다행히 기자가 그를 만났을 때는 환자복을 입고 있긴 했었지만 나름 호전된 모습이었는데, 자신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 당시’의 신포동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기자에게 건넬 때 보였던 ‘어린아이같은 순수함’은 꽤나 인상에 깊이 남았다.
 
그가 팝송을 처음 들었던 시기는 어린아이였던 한국전쟁 직후 시점이었다고 한다. 국내에 잔류해 있던 미군들이 자주 가는 바가 당시 신포동에도 7곳 내외로 있었고, 호기심에 미군을 따라갔다가 그들에게 초콜릿, 껌, 치즈 같은 당시 희귀품을 얻어먹어도 보면서 그들 주변에 자연스럽게 흐르던 팝송을 접했다고 한다. 물론 열정적으로 듣기 시작한 것은 감수성 어린 청소년 시절부터였고, 그렇게 시작해 지금까지 음악과 함께 지내왔다는 것이다.
 
어릴 때에도 “곡목을 알고 들은 건 아니자만 미국엔 참 좋은 음악들이 많구나”라고 느낀 그는 곧 미국 포크 음악을 국내에 도입한 가수들과도 친분을 쌓아갔다고 한다.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등 쎄시봉의 멤버들은 물론 이동원, 투에이스 오승근, 이수만, 김정호 등이 인천에서 했던 활동에 대해 기억을 더듬어 기자에게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그중 송창식-윤형주의 ‘트윈폴리오’는 성공회 내동교회 뒤뜰에서 기타 연주도 했었고, 해바라기의 이주호는 과거 연안부두 인근 라이프아파트에 거주한 적도 있었다고.
 
당시 병상에서의 윤씨는 기자에게 “건강이 허락하고 문화재단이 원한다면 같은 프로그램을 또 할 것”이라 말했었다. 그러나 그의 별세로 이는 이루어지지 못하게 됐다. 그러나 세상과 이별하기 직전까지 그의 음악을 향한 신념은 변함이 없었다. “동네는 변하겠지만, 음악이 주는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사람들은 계속 있지 않겠느냐”는 그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기자의 귀에는 생생하다.
 
그러고 보니 생전 그에게 “본인의 이름이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이에 그는 “그저 신포동에서 ‘휴머니스트’로 기억되면 더 바랄 게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세상과 이별한 직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따뜻하고 인간적인 사람”이라고 추억했다. 그러고 보면, 적어도 그의 가장 큰 바람은 이루고 떠난 것이 아닐까.
 
오랜 기간 신포동의 음악 전도사로 활동해온 그의 명복을 빈다. 또, 이제 곧 역사 속으로 사라질 신포동 1세대에게도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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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노777 2017-02-14 13:56:42
하늘나라에서도 좋은음악 들으실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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