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총통 차이잉원, 대만은 준비되어 있었다
상태바
새 총통 차이잉원, 대만은 준비되어 있었다
  • 진달래 기자
  • 승인 2016.01.18 17: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걸그룹 '쯔위' 사태에 '올바른' 분노 표출

지난 16일 대만 총통선거의 대장정이 막을 내렸다. 선거 직전 한국 걸그룹의 대만인 멤버 “쯔위”의 중국에 대한 사과 동영상이 업로드돼 이번 대만선거는 유례없이 한국인에게도 큰 관심을 모았던 선거였다. 사과동영상이 이번 선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물론 그와 관계없이 당선이 유력시되던 후보는 이제 대만 최초의 여성 총통으로서, 현재 아시아에서 가장 진보적인 나라를 만들 수 있게 됐다.

대만에서 지켜본 첫 시위

필자는 지난해 2월부터 7월까지 약 4개월간 대만에서 교환학생으로 체류하며 대만의 면면을 경험했다. 어느 날은 이민서(한국의 외국인출입관리소와 비슷한 곳)에 갈 일이 있었다. 여기에서 한 무리의 중년 여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중국 본토에 있는 자식들이 20세가 넘었다고 대만 비자를 내주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며 시위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국의 웬만한 기자회견이나 시위만큼 강경했고, ‘모친절’에 자식을 만나지 못하는 슬픔을 충분히 전하려 했다. 경찰들이 이민서 문을 막고 서 있어 대치 상황을 연상시켰다.

시위가 끝나갈 때쯤, 한국의 다른 시위들처럼 이민서에 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들은 들어가려다 경찰들에 의해 저지되었고, 나는 이들이 뭔가 폭력적인 상황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궁금증으로 계속해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웬걸, 그들은 경찰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입고 있던 시위용 옷을 벗고 입장하기로 협상을 보았다. 몇 분도 되지 않아 그들이 줄을 지어 평화롭게 이민서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시위가 저렇게 바로 대화로 이어질 수도 있구나!"


한국 방송에 나온 화면이 한 나라의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칠 줄이야

1월 15일 밤, 유튜브에는 한 동영상이 게재되고 대만을 둘러싼 동북아권의 시청자들을 불러모았다. 이는 JYP 소속 걸그룹인 ‘트와이스’의 대만인 멤버 ‘쯔위’의 사과 동영상이었다. 이들이 지난 11월 촬영한 ‘마리텔’ 내용이 1월 방송되었는데, 이 장면에서 그가 소품으로 제시된 대만 국기와 한국 국기를 동시에 흔들었다는 이유로 친중국 대만인 가수인 ‘황안’이 그를 “대만독립운동분자”로 '저격'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중국인들은 쯔위를 ‘하나의 중국’이라며 대만을 지켜 주는 중국의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독립운동가로 인식했다. 중국 내 여론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JYP는 사태 초반에는 “쯔위는 정치적 입장을 가질 만큼 나이가 많지 않으며, 소품으로 제공된 국기를 흔든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맞섰다. 그러나 중국에서 만다린어를 사용하며 진행되었던 쯔위의 광고는 이미 상당히 짤린 상황이었다. 중국의 연예시장은 한국과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규모의 시장으로, 그곳을 잃고 싶지 않았던 JYP가 택한 것은 “쯔위가 직접 나와 ‘나는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며, 중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나와 회사의 잘못도 있다’ 고 사과시키는 것”이었다. 


굴욕적인 사과가 가져온 것은 중국의 포용이 아니라 대만의 반발

이 동영상을 보고 대만을 포함한 동북아 전체가 뒤집어졌다. 한국인들은 “중국 시장이 아무리 좋아도 16세 아이에게 모든 정치적 부담을 떠안은 사과를 시키도록 하다니 JYP의 정치적, 경영적 감각에 매우 실망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중국인들 또한 “대만 사람이 대만 국기를 흔든 것이 ‘하나의 중국’원칙을 딱히 어긴 것도 아닌데, 이것을 과대해석한 황안의 책임인데 JYP가 너무 성급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가장 분개한 것은 물론 쯔위의 고향인 대만 사람들이다. 자칫 쯔위가 중국에 굴복한 모습을 탓할 수도 있던 이들은 #standbyTzuyu 등의 해쉬태그를 달며 “나는 대만인으로 사는 것이 자랑스럽다. 또한 대만은 중국과 관계없는 독립 국가이며, 중국은 대만을 편입시키려는 계획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대만은 현재 독립된 정부와 사법/행정/입법 체계를 지니고 있으며, 중국의 압박으로 인해 UN에 가입되지 못하는 등 세계적으로 독립국의 지위를 아직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만을 뒤덮은 “집에 가서 투표하자"

1월 16일 선거는 새벽에 시작되어 오후 4시에 종료되었다. 당시 동영상을 본 수십만 명의 대만 청년들은 바로 투표지로 돌아가 투표를 하자는 논의를 나눴다. 이들은 “回家投票(집에 돌아가서 투표하자)“를 유행어처럼 번지게 만들었다. 일본에 있다가 바로 새벽 비행기를 샀다는 청년, 버스로 6시간 걸리는 고향에 돌아간 청년 등 이번 선거에서 걸그룹 사태에 분개한 대만 국민들의 반응은 엄청났다. 

선거 결과, 56.1%의 대만 국민이 총통으로 2번 민주진보당의 차이잉원 후보를 지지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지난 8년간 집권해 온 국민당의 주리룬 후보가 31%를 얻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다. 차이잉원 후보는 이로 인해 중화권 국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됐다. 차이잉원 후보는 당선되자마자 “쯔위는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강요받아서 사과한 것이다. 당선시켜 준 대만 국민들의 의지를 모아 앞으로 국내외적 압박에 강하게 대응할 것”이라는 의지를 밝혔다.


이미 당선 유력시되던 '독립파' 민진당 후보에 지지 밀어줘

하지만 민진당 차이잉원 당선자는 이미 국민당이 주리룬 후보 전 예비후보였던 홍슈주 씨(당시 대만 입법원 부원장)와의 경합에서도 유력했던 바 있다. 그의 선거 캠페인은 대선 직전 잠깐 이뤄진 것이 아니라, 차이잉원 당선자가 민진당 주석으로서 계속해서 정책을 개발하고 선거를 해오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차이잉원 후보의 캠페인 영상. 맹인, 어린이 등 사회의 다양성을 대표하는 국민들이 ‘대만어’로 직접 부르는 노래가 차이잉원이 직접 찾아갔던 대만의 산업 현장 영상과 함께 나오고 있다.>

대만의 선거 아젠다는 한국과 매우 큰 분위기 차이를 보인다. 이 곳에서도 여당과 제 1 야당이 가장 큰 세력으로 대립하는 양상은 비슷하다. 그러나 이들이 붙잡고 싸우는 한국의 ‘토건 정책’ 혹은 ‘세금내고 받는 무상복지’ 같은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마잉저우 정부 때에 이미 탈핵은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되어 있던 사항으로, 여당 및 야당 모두가 대안 에너지 체제를 강화하는 에너지 플랜을 제출했다. 

또한 차이잉원 후보는 지난 대만 성 소수자 축제 때 직접 녹화한 비디오 축하 메세지를 보낸 적이 있으며, 이를 자신의 페이스북 상에 게재했다. 심지어 차이잉원 후보는 미혼으로, 동성애자가 아니냐는 의혹도 받고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이전의 애인이 교통사고로 숨진 뒤 연애를 할 겨를이 없었다”고 일축한 바 있다. 


선거 결과 뒤에는 대만의 ‘성숙한 선진적 민주주의 문화’ 있어

2천400만명여가 살고 있는 대만에서는 민주주의적 제도가 뿌리내려 있다. 대한민국에서 정권교체는 지금까지 겨우 단 한 번 이뤄졌지만, 대만에서는 벌써 세 번이나 이뤄졌을 정도로 선거라는 민주적 과정을 통한 정치의 기반이 닦여 있는 나라이다. 이미 성별에 관계없는 노동과 여가시간의 보장으로 어느 정도 균형있는 삶을 영위해 오고 있던 곳이다. 

대만 전역의 1만 5천여개 투표 및 개표소에서는 선거가 끝난 뒤 감시 하에 직접 수개표를 한다. 투표소에서 감시하던 인력이 그대로 개표로 이어지기 때문에 개표 부정의 여지도 덜하고, 수개표이기 때문에 기계 오작동이나 조작 의심을 하기도 어렵다.

한국에서라면 ‘김치녀’라며 비아냥의 대상이 될 법한 “고학력 미혼 여성 정치인이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모습은 당당히 차이잉원을 수식하는 선거 아젠다가 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표상하는 3D캐릭터를 직접 만들어 홍보했다. 한국의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이 부임한 이후 여성과 남성 간의 임금격차는 계속 벌어지기만 하고, 사회의 보수화 및 여성 차별/폭력을 막지 못하는 양상과는 대조적이다.

이런 그의 모습은 한국에서 부인과 아이들을 동원, 정상가족의 모습을 재현하며 그에 맞지 않는 이들을 ‘루저’로 만드는 많은 보수적 중년남성 정치인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가 고양이를 안고 찍은 선거 사진은 사회의 현대화로 인해 많아진 1인가구, 미혼 여성의 삶 보장, 반려동물 정책에 대한 희망 등 21세기 현대 대만 청년들이 원하는 방향에 정확히 꽂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차이잉원 총통이 만드는 새로운 ‘중화권 선진국’에의 기대

고 리콴유 전 싱가폴 총리의 리더십으로 일궈낸 싱가폴은 높은 국민소득과 생활수준으로 아시아의 선진국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그 과정이 민주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대만은 자신을 압박하는 공산주의 국가 옆에서 상대적으로 민주적 정부에 대한 더 큰 압박을 받으며, 주변 국가와 경제적으로 밀접하게 교역하며 발전해 온 국가이다. 

물론 이곳에도 타이베이의 살인적인 집값, 균질하지만 지나치게 낮은 노동소득, 넓은 농지로 인해 한국과 같이 건설업이 부흥할 가능성이라는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중국과의 FTA를 학생들이 국회 점거를 통해 막아내고, 위의 직접 경험한 바와 같이 이들은 아무리 힘 없는 국민이라도 (심지어 외국인도!) 상대방을 중요한 대화 상대로 여기며, 그들의 말이 맞다면 모두가 맞는 방향으로 변화 수 있다는 ‘여지’를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선 이미 자본의 논리건, 정치의 논리건 절대적이고 이길 수 없는 것은 없으며, 사람들의 동의 없이 강압적으로 진행되는 국가 정책이 ‘모두에게 나쁘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이런 나라이기에 차이잉원과 같은 총통 또한 가능했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