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삶에 이웃으로 다가서는” 사진가 서은미를 만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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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삶에 이웃으로 다가서는” 사진가 서은미를 만나다. (2)
  • 민운기 스페이스빔 대표
  • 승인 2015.03.31 11: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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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간 [시각] 협약기사
사진작가 서은미 씨


화교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볼 때 소수자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관심이 어렸을 적 부친께서 전쟁 고아를 돌보았던 활동과도 연관이 될까요?

앞 질문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아버지의 삶 자체는 전쟁고아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수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영향을 받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는 최분도 신부님과 러시아에 있는 고려인들을 위한 일들을 벌이셨었지요. 정말 글로벌하게 사셨지요. 지금은 미국에 입양된 아이들이 성인이지요. 그분들을 위해서 일을 계속 하고 계십니다. 얼마 전에도 국립입양원이라는 기관에서 아버지를 통해 입양되지 않은 전쟁혼혈아분인데도 아버지를 뵙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를 만나면 한국의 가족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 거라는 이야기를 하셨다고 합니다. 요즘은 그 기관에서 한국을 방문하는 입양아나 입양기관의 관계자들이 계속 아버지를 찾고 계십니다. 아버지를 통해 입양된 경우 관련 기록은 말할 것도 없고 이렇게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 아버지는 직ㆍ간접적으로 자료들을 수집하고 본인이 직접 나서서 고국을 방문하는 그들에게 든든한 지원자를 자처하고 계십니다. 

대여섯 살 때 만난 양로원 할아버지들은 정말 신기에 가까운 분들이었습니다. 양로원 밭농사도 그랬고, 바닷가인 서포리에서는 조금만 부지런하면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소라나 낙지는 양로원 할아버지 덕분에 제가 맛볼 수 있는 것들이었지요. 바닷가라고는 하지만 아버지가 어부도 아니셨고 우리집은 동네 안쪽에 있어서 특별한 일이 있지 않으면 바다에 나가는 일은 없었던 나에게 양로원 할아버지들의 생활은 그 자체가 신기한 것들이었습니다. 국민학교를 다닐 땐 양로원 할아버지들을 잊고 지냈던 것 같습니다만 소풍을 월미도로 자주 갔는데 자유공원을 넘어 화교학교를 지날 때 들려오던 소리들은 내가 만난 또 다른 화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살면서 양로원 할아버지들 말고는 화교 분들을 소수자라는 생각을 별로 하지 못했습니다. 중학교 때 동네 중국집 아저씨는 명절 때마다 월병을 선물해 주셨고 그 집이 가게를 확장해 가는 모습을 보며 자랐기 때문일 것 입니다. 언어와 풍습이 조금 다르다, 라고 생각을 했지 그분들이 나와 다르다, 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성장기에 워낙 다양한 이들과 같이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분들이 한국사회 속에서 어떻게 사셨는지는 잘 몰랐습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보니 용현동과 주안 그리고 부평에 화교소학교의 분교가 있었을 정도로 인천엔 화교가 많았는데 잘 모르고 지냈던 것이지요. 인천관광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 했던 일을 두 차례 기관을 통해 진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본격적으로 차이나타운의 화교 분들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땐 오히려 이번 전시를 준비할 때보다 어렵지 않았습니다. 차이나타운 내에 있는 요식업소와 소매점 등의 현황을 조사하였는데, 그때는 그분들의 개인사는 다루지 않아 수월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때 작업에서는 다루지 않아도 각각의 업소마다 특징들이 있어서 따로 기록을 해 두고 그것을 기반으로 나중에 ‘인천이지안’ 작업에 활용을 하기도 했습니다. 분명 화교는 우리사회의 소수자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번 작업을 통해 그런 마음을 스스로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만나는 많은 화교들 역시 '우리'라는 표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 단어가 내포한 많은 의미들을 되새기고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이웃'이 아니라 '우리'로 같이 살아가는 것이지요.
 



 

화교들과 교류하며 그 분들의 한국 또는 인천에서의 삶에 대해 남다른 이해와 생각을 가지고 계실 거라 생각하는데 어떠신지요?

대 여섯 살 때의 기억부터 국민학교 때 학교 근처에서 만난 화교, 몇 년 동안 가깝게 지낸 동네 중국집 화교 가족들은 그 모습이 비슷했습니다. 우리와 말을 다르게 사용하고 약간의 문화적 차이랄까 결코 크게 낯선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회생활을 하며 만난 화교들은 그간 내가 만나왔던 분들과는 왜 다른지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많은 이들은 화교들이 폐쇄적이고, 의심이 많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그런 이야기의 원인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생각을 많이 해 보았습니다. 단순히 한국사회에서 살면서 받아온 제도적 차별 때문일까?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 있을까? 많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속 시원한 답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자체가 색안경을 끼고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이었으니까요. 

2013년 한국인천화교협회 소장자료 아카이빙 작업을 할 때도 화교협회에서 느꼈던 시선들이 다른 이들과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130년 간의 그들의 자료를 꺼내 놓고 그것을 다루는 우리들을 보며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왜 궁금해 하는 것인지, 저 자료들이 어떻게 사용될지 그들 역시 의문이었을 테니까요. 먼지와 곰팡이 그리고 작은 동물들의 사체까지 등장했던 자료들을 온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고분분투했던 시간들은 그런 간극을 좁힐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마스크와 앞치마로 무장(?)을 하고 먼지와 곰팡이를 제거하고 보존처리를 하는데 걸린 시간이 처음 예상이었던 1개월이 아니라 5개월 정도 소요되는 전 과정을 지켜본 화교협회 분들은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을 진행한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관계자 교수와 화교협회 임원들은 수시로 만나 교류를 했지만 그분들이 현장에 항상 같이 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현장에서 일한 이들의 자세가 그분들의 태도에 변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개항 초기 관련 자료들로부터 최근 자료들까지 현장에서 작업하는 이들에게는 해독 불가능한 난수표였지만 이런 작업이 다음 작업에 기초가 된다는 것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작업 중에 인천 지역사회에서 화교들에 대한 제도적 문제점들을 보게 되었고, 그런 것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인천에 살면 가족 중 한 두 명은 선인재단 내 학교에 진학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던 선인재단 내 인천대학교 부지는 화교들의 공동묘지로 사용되었는데, 학교 설립 과정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기록된 자료들이 한 뭉치가 나왔습니다. 고등학교를 선인재단 인화여고를 나와 더 눈이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화교들에게 묘지의 의미는 인천대 중국학술원 송승석 교수의 논문으로도 몇 차례 발표될 정도로 중요합니다. 그런 곳이 폭력적인 개발로 만수동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부평으로 이전하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그 자료의 먼지를 털며 스캔을 하고 보정작업을 하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 당시 해외에 살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생각이 미치더군요. 난 국수주의자도 민족주의자도 아니지만 그들의 지난한 삶을 피상적으로나마 간접적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화교를 대하는 내 자신의 마음자세가 바뀌었습니다. 온전히 우리로 지내기로... 역사적인 많은 사실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묘지 하나를 봐도 어떻게 살았는지가 대변될 것 같았습니다.

요즘은 관광지로 개발되며 그들의 이야기는 빠진 모습으로 어색한 분칠을 한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 같은 차이나타운에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몇 해 전에는 차이나타운 개발을 위해 현재 화교학교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그곳을 없어진 청나라영사관 자리라는 것으로 만들어 관광상품으로 개발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백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학교를 관광개발을 이유로 관청에서 이전시키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창피해서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화교들의 반발로 무산되었습니다. 차이나타운과 화교를 관광 상품으로만 취급하는 것이 현재 지자체의 수준입니다. 그곳에 숨겨진 다양한 스토리들을 발굴하였으면 좋겠는데, 엉뚱한 벽화거리를 몇 개씩 만들고 그것이 지자체의 성공 행정이라고 포장하는 것이 걱정스럽습니다. 그곳은 단순한 관광지이기 전에 그들의 삶의 터전입니다.
 


2014 문화다양성 확산을 위한 무지개다리사업_천 개의 마을 천 개의 문화_자료집 


이번 한국화교생활사 사진전 <서랍 속에서 기억을 찾다>는 이전의 <화교. 말을 걸다>, <淸館, 淸觀> 전에 이은 세 번째 기획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모두 관여하셨는지, 그리고 이를 준비하며 가졌던 남다른 생각이나 입장이 있으셨는지요?

2011년 <화교. 말을 걸다> 전시는 기존의 많은 화교 관련 전시와 같이 작가들의 시선으로 본 화교들에 대한 전시였습니다. 다만 전시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동안 화교들에게 많이 들은 이야기가 기존의 전시들은 화교들을 너무 어둡게 표현을 해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항상 아웃사이더로 비춰지는 모습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준비했던 것에서 수정을 과감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그들이 원하는 그들의 밝은 모습을 보고자 노력했고 그런 준비로 오랜 시간 알고 지낸 동네 중국집 화교가족을 하나의 시리즈로 담았고, 차이나타운에서 만난 다양한 연령대의 화교들을 담았습니다. 중산학교에 다니는 여고생의 밝은 모습에 그들의 미래를 표현하고자 했다면 과장이지만 그 모습으로 그들의 밝은 모습을 본 것 자체가 기쁨이었습니다. 보통은 한가지로 작업을 하고 발표를 하는데, 나는 그들이 원하는 모습을 담고 싶었습니다. 작업의 완성도는 떨어져도 그들이 그들의 모습을 보고 행복했으면 하는 바램이 그 전시를 준비하며 제일 신경을 썼던 것입니다. 예상대로 사진가의 작업으로는 한참 부족하다는 악평을 들었고, 화교들에게는 감사의 인사들 들었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한 전시였습니다. 

2013년 <淸館, 淸觀>은 차이나타운에는 많은 이들이 그들 나름의 삶의 공간으로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준비하고 전시를 하였습니다. 전시 오픈 당일 지방선거와 맞물려 많은 정치인들이 찾아와 솔직히 아쉬움이 컸습니다. 누구를 위한 전시인지 회의가 들기도 했지요. 그들에겐 화교들도 유권자로 보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으니까요. 그 전시에서는 차이나타운에서 살고 있는 화교, 한국인, 신화교 그리고 관광객처럼 그곳을 방문하는 타인들 등 작은 공간 안에 펼쳐지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2015년 <서랍 속에서 기억을 찾다>는 작년 여름부터 전시를 준비하였는데, 이 전시가 비로소 화교들을 온전히 세상 밖으로 꺼내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앞의 두 전시는 타자의 시선에서 본 전시였으니까요. 처음 사진을 모을 땐 크게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 시작을 했는데 그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화교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서도 무모한 도전이라는 표현을 들었습니다. 화교들의 성향이 폐쇄적이고 그들을 우습게 봤다는 핀잔을 계속해서 들어야 했습니다. 초반에는 내가 이 일을 왜 기획했는지 후회를 하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매일 차이나타운에서 만나는 많은 분들은 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시고 하나둘씩 거들어 주셨습니다. 특히 작년 사진수업으로 가깝게 지내는 화교학교 선생님들은 시간이 나실 때 마다 나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셨지요.

한 달 쯤 지났을 때 화교학교를 은퇴하신 선생님으로 부터 연락을 받고 가보니 앨범 9권을 놓고 필요한 사진을 표시하라는 반가운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앨범 하나하나를 넘겨가며 보니 어느 것 하나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고 있는 화교들의 생활사가 얼마나 피상적이었는지도 깨달게 되는 시간이었지요. 처음엔 본인이 직접 스캔 후 주시겠다던 선생님은 앨범 9권을 모두 내 주시며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한 일인데 말이지요. 그 앨범을 스캔하고 그 소식이 화교사회에 퍼졌기 때문이었는지 여기저기서 사진을 가져가라는 연락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즐거운 비명이 하늘을 찌르는 순간이었습니다. 많은 사진을 확보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진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것 또한 큰일이었습니다. 집안마다, 지역마다 풍습이 다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알 수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구별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제공해주신 분들의 이야기를 기초로 각종 문헌정보와 다른 화교 분들의 도움으로 일반 세시풍속과 생애사에 대한 큰 카테고리가 정리되는데 걸린 시간은 전시를 코앞에 둔 시점이었습니다. 관혼상제에 관련된 중국논문을 비롯해 국내 자료들과 화교들의 구술로 정리된 사진을 한정된 공간에 전시하는데 너무도 제약이 커서 걱정이었습니다. 아쉽지만 1천5백장의 사진 중에 1백5십장을 전시에 사용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리고 사진을 선택하는 작업은 정말 피를 마르게 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사진 한 장을 제공해준 분도 있고 앨범을 9권 제공해준 분도 있는 상황이라 사진의 내용이 겹치는데 가능하면 사진을 제공한 이들의 사진은 그 한 장까지 모두 사용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들에 대한 예의였기 때문이지요. 결국 사진을 제공한 이들은 모두 한 장이라도 전시에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전시 오픈 당일뿐만 아니라 전시기간 중에 인천뿐만이 아니고 지방에서는 물론 멀리 외국에서도 찾아오는 분들이 계실 정도여서 얼마나 보람된지 모르겠습니다. 동네 카페 입간판에 붙여있던 전시포스터는 지나가던 분이 사진 속 인물이 친척이라며 기념으로 소장하겠다고 가져가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간의 많은 전시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타자의 시선으로 본 화교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 전시를 통해 화교 스스로 한국사회에 본인들을 이야기를 꺼내 소통하고자 한 것에 큰 의의를 두고 싶습니다. 비로소 내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지요. 전시에 사용하지 못한 사진들이 자료집으로 엮여 나오고 또 그분들의 많은 이야기들이 세상에 나와 소통되기를 바랍니다.
 



 

선생님은 화교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국면에 놓여 있는 세대와 계층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앞으로의 활동 계획과 연계하여 말씀해주실 수 있으세요? 

이런 것들은 나의 삶이 유별스런 부모님 덕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한동안 사진 공부에 집중하고 있을 때 큰 아이가 희귀난치성 질환을 앓게 되고, 그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은둔자로 지내기도 했었습니다. 하던 모든 일들을 놓고 아이와의 병원 생활이 전부였었습니다. 주치의 표현을 빌면 투사기 되어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것들은 결코 나의 고통이 될 수 없었고 내 고통이 되었을 때서야 비로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더군요. 한동안 병원과 국회를 일터로 아주 치열한 삶을 살았던 적이 있었지요. 그때 많은 것을 깨닫게 되더군요. 흔히들 이야기하는 그런 것들이요.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병원에 입원한 아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별로 없었습니다. 사회의 모순된 제도의 벽을 어떻게 넘어야할지도 문제였고, 당장 아이의 혼란을 어찌해야할지가 급선무였습니다만 나 역시 혼란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지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가 대학에 진학하고 작은 학교사회에서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며 정신을 차린 것 같습니다. 방학동안 지역에서 활동하는 청년들의 모임에 아이도 함께하며 내 아이에 대한 관심에서 또래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아이가 발병했을 때는 또래 아이들은 물론 또래 아이를 둔 친구들도 만나지 못했었습니다. 형제들도 물론이구요. 큰 아이의 대학 첫여름 방학에 <동네탐구생활프로젝트>라는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진행하는 청년들이 대견스럽고, 그 프로젝트를 수행한 아들이 대견스러웠습니다. 그 청년들이 날 구원해 준 것이지요.

대학에서 오랜 시간 강의를 하면서도 그들의 문제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나도 청년 시절 서울 지향적 생활을 꿈꾸었고, 실제로 직장생활도 서울에서 했던 것들을 돌이켜보며 내 고장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던 것이 창피할 따름이었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지역에서 나름의 삶을 계획하고 살아가는 모습들을 곁에서 바라보며, 그들을 기록하고자 몇 해 전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올해에 좀 더 집중할 예정이구요. 또한 연일 뉴스에 나오는 베이비부머 세대인 내 형제들의 또래들의 제2의 인생준비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 화교들도 포함이 됩니다. 처음 ‘인천이지안’에서 그랬지만 이번 작업에서도 그렇지요. 그 작업 속에 자연스럽게 인천에 살고 있는 화교들이 포함된 것입니다. 전에도 이번에도 화교라는 특별한 인연이 아니라 인천에 살고 있는 인물이란 점에서 나의 관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또 작년 겨울 갑작스럽게 만나게 된 다른 지역의 아카이빙 작업을 하고 있는 활동가들과의 교류도 활발하게 하려고 합니다. 저의 아버지의 자료에 대한 작업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이번에 휴대용스캐너를 구입했습니다. 사실 저의 가장 큰 지지자인 남편의 선물입니다. 
 


한국화교생활사 사진전 모습

 

선생님의 이런 활동을 함께 하시는 분들이 주변에 계신 것 같고, 많은 도움을 주는 분들도 계신 것 같은 데요. 소개를 해주실 수 있으세요? 

하도 벌여놓은 것들이 많아 어느 것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 지 잠깐 생각을 합니다. 인천화교협회 소장자료 아카이빙 작업은 인천대학교와 2013년 10월부터 2014년 9월까지 작업을 했는데 그 일에 함께 하게 기회를 준 인천대 송승석 교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아카이빙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된 지식도 갖추고 있지 못한 나에게 큰 도움을 준 계양도서관의 박현주 선생님은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였습니다. 물론 직접 현장에 방문하여 지도해준 인천시립박물관 이희인, 허윤선선생님과 동료분들은 그 작업의 완성도를 높여주셨습니다. 화교생활사 사진전은 2014년 9월부터 시작해서 2015년 1월말까지 전시를 오픈하고 인천대와의 일은 마무리 되었습니다. 

인천문화재단의 정지은 과장과 무지개다리 사업을 두 해 진행하고 올해도 진행할 예정입니다. 워낙 열심히 하고 있어서 저는 쉽게 묻어가는 기분입니다. 올해는 어떤 결과물들이 나오게 될지 벌써 기대가 큽니다. 

개인적인 작업으로 지역청년들의 활동을 기록하려는 것은 우선 청년플러스에서 활동 중인 많은 친구들 중에 신포살롱과 버스토리 친구들과 화교학교의 선생님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독서모임도 만들어 재미없지만 같이 공부하고 싶은 책들을 선정해 같이 읽고 토론하는 모음을 진행 중입니다. 

인천에서 활동 중인 많은 활동가분들과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이 도움을 주고 계신데 다 나열하려니 참 힘이 드네요. 제가 알고 있는 모든 분들이 도와주시고 계시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저와 뜻을 달리하고 계신 분들의 의견도 저의 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는데 같은 뜻을 가진 분들의 도움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오래전 아버지의 구술채록을 진행했던 친구 윤진현 씨와 올해 저의 개인작업 ‘인천이지안’의 인물에 대한 구술채록을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그 일은 지역에서 출판일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친구 윤미경 씨도 같이 하게 될 것입니다. 다들 개성이 강해서 함께 일을 한다고 하면 지인들이 크게 웃겠지만 그래서 더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얼마 전 복합문화공간 <콘서트 하우스 현>을 오픈한 조화현 씨와 김경언 선생님은 나의 든든한 후원자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나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동료사진가 민경찬 씨와 유별남 씨와의 작업도 계속될 예정입니다. 이렇게 나열하다보니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큰일이네요. 오빠 친구이자 동네 선배인 떡집아저씨 이종복 선생님도 내가 힘들 때 나의 넋두리를 다 들어주고 응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설 연휴가 지나면 찾아가 또 한 보따리의 넋두리를 풀어 놓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동네 찻집으로 내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팟알의 백영임 대표께서 많이 도와주시고 계십니다. 진행되는 일들을 홍보해 주시고 직접 참여도 해 주시고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항상 나의 든든한 지지자인 남편의 도움은 그 어떤 분들의 도움과는 비교하기가 어렵습니다. 팔불출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며 부모님의 은혜와 그 다음이 남편의 조력이 가장 컸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도와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분들이 항상 곁에 있어서 든든합니다.

아마 이 원고를 보내고 땅을 치며 후회하며 이름을 올리지 못한 분들을 떠올릴 것 같습니다.(꼭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말하는 기분이네요.)
 


지난 2월 24일 콘서트하우스 현에서 마련했던 '천개의 토크' 진행장면. 인천문화재단의 문화다양성 확산을 위한 무지개다리사업에 참여했던 분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끝으로 선생님의 예술 활동에 있어 ‘사진’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진은 저의 생각을 드러내고 그것을 타인과 소통하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사진가 돈 맥컬린의 이야기처럼 인간적인, 되도록 인간적인 사진가가 되도록 노력하며 살고 싶습니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매 순간 강렬하게 누군가의 인생을 음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어린 내게 카메라를 들려준 아버지는 아마도 내가 이렇게 성장하고 활동하기를 기대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그러셨듯이 나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다른 어떤 예술활동보다 소통의 도구로 사진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외 이 지면을 통해 하시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해주세요.

처음에 왜 지면 인터뷰를 하자고 했는지 후회가 됩니다. 말 주변도 없고 더욱 글은 형편없는데 말입니다. 연휴가 길어서 좋다고 하다가 동네 커피집에 노트북 들고 나와 이틀째 이 질문지에 답을 하고 있습니다. 작성한 내용을 보면 마음에 들지 않아 지우기를 몇 번 이제는 긴 연휴가 원망스럽습니다. 차라리 스페이스 빔으로 찾아가 인터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제부터 마지막 질문에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 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친절한 답변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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