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 필요 따라 인하대 총장 임명, 중도사퇴 반복돼
상태바
한진그룹 필요 따라 인하대 총장 임명, 중도사퇴 반복돼
  • 이희환 기자
  • 승인 2014.12.23 00: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이은 총장 중도사퇴, 인하대 총장의 '흑역사' (2)
1980년대 인하대 교내의 학생집회 모습  
 

1987년 6월민주화항쟁을 겪으면서 사회민주화에 앞장 섰던 대학생들은 1988년부터는 학내민주화운동을 전개하면서 대학사회 내에 만연해 있는 낡은 관행을 민주화하기 위한 학내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그런 와중에 1988년 인하대에서도 한진그룹 임직원의 자녀들이 특혜입학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968년 한진이 인하학원을 인수할 당시부터 재단 상임이사에 선임돼 학교 행정에 깊이 관여해왔던 박태원 총장이 불명예 퇴진해야 했다.

그간 주목되지 않았던 인하대 재단 문제가 조명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학생들은 민주총장 선출 요구와 함께 등록금투쟁을 전개했다. 전해에 이어 1989년 4월 들어 학생들은 총장 직선과 등록금 동결을 요구하며 부총장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전개하는 한편 총학생회 주최로 수업거부를 결의하면서 재단을 상대로 학원민주화투쟁을 거의 해마다 전개했다. 

조중훈 이사장과 원영무 총장

학생들이 요구했던 총장직선제는 그러나 곧바로 실현되지 않았다. 박태원 총장의 사퇴 이후 총장 직무대행이었던 원영무 교수가 제7대 인하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인하대 건학 36년만에 동문 총장이 취임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재임기간 내내 대학 구성원간의 갈등과 대립을 원만하게 조정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원 총장에게 재단의 관심이나 지원이 없었다. 조중훈 이사장이 학교를 찾는 회수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대학구성원들의 질시와 재단의 무관심 속에서 원 총장은 홀로서기도 아니고 버티기도 아닌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4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평가된다. "아무도 원총장의 재임은 사립대학에서의 총장이 위상과 한계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라고 김민배 인하대 교수는 1994년 기고한 글에서 지적한 바 있다.(김민배, <건학40년, 인하대 어디까지 왔으며 어디에 있나>, [인하] 33호, 1994년 봄호)

전국적인 학원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인하대학교에서도 총장 직선제가 처음 실시된 것은 제8대 총장 선거였다. 재단에서는 서울대 출신으로 문교부차관과 충남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조성옥 후보를 내세웠다. 이에 맞서 홍승홍, 장지호 후보가 나섰으나 선거 결과 조성옥 후보가 총장에 당선됐다.

총장직선제라는 민주적 제도를 어렵게 얻어낸 과정에 비해서서 너무도 싱거운 결과였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학내 구성원들, 특히 교수사회의 소아적 분열 등이 크게 작용했다는 지적이 많다. 


총장 직선제 개표 결과 게시판
 
한차례 총장직선제를 실시한 이후 재단은 제7대 총장 선거를 다시 임명제로 전환했다. 그리고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거쳐 내무부 차관과 교통부 장관을 역임한 노건일 씨를 제9대 총장에 임명했다.

1998년 3월 취임한 노건일 총장은 취임 이후 6개월간 자신의 집무실에 들어가지 못한 채 총장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이 당시까지도 여전히 등록금투쟁을 중심으로 한 학내민주화투쟁이 이어졌고 게다가 재단의 낙하산 총장 임명반대를 외치며 총장실 점거 등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건일 총장은 농성중인 학생대표단이 내건 여러 요구조건 중 도서관이나 기숙사를 지어달라는 요구사항을 전해듣고는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두 건물 모두 지어주겠다는 내용으로 담화문을 발표하고 나서 총장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교통부 장관을 역임한 노건일 총장은 재단의 간섭을 일제 배제한 채 재단에 인하대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을 강하게 요구하는 등의 뚝심을 보여줬다고 한다. 재단의 영향력 아래 있던 총장들이 학교와 관련된 업무를 재단에 일일이 보고한 데 반해 노 총장은 일체 보고를 안 했을 뿐만 아니라 재단에 요구할 사항을 통고할 정도였다고 퇴직한 교직원들의 전했다.

1997년 10월 조중훈 회장의 장남인 조양호가 인하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했지만, 조중훈 회장이 여전히 인하학원 이사로 참여하면서 인하대 학교운영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때였다. 노 총장의 뚝심은 그러나 그가 교통부 장관을 역임한 인물이었기에 한진그룹과의 일정한 주고받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후문이다. 

연임이 예상되던 노건일 총장은 그러나 조중훈 회장이 지병인 당뇨와 고혈압으로 입원하는 상황 속에서 연임이 어렵게 되고 그 대신 제10대 총장은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원장과 해양수산부 차관을 역임한 홍승용 총장이 2002년 3월에 취임했다. 조중훈 회장이 2002년 11월 17일 타개하자 이제 인하학원은 조양호 현 이사장의 체제로 급격히 변모했다. 

조중훈 회장의 타개 이후 한진가 2세들 사이에서는 조중훈 회장의 유언장을 둘러싼 법정 공방이 일었다. 2005년 말부터 정석기업의 차명(借名) 주식 반환문제, 대한항공 면세품 공급업체 변경문제 등을 놓고 전개된 법정공방이 2010년에는 조 전 회장의 별장인 '부임장'의 상속 문제를 둘러싸고 유언장의 진위 여부를 검증하는 소송이 진행된 바 있다.


제10대 홍승용 총장의 취임식 장면  

한편, 홍승용 총장이 2006년 한 차례 연임한 이후 2008년부터 정석인하학원 이사로 취임한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과 이사회 석상에서 모욕적인 폭언을 듣고 2008년 12월 총장에서 중도사퇴한 사정에 대해서는 이미 언론에 널리 보도된 바 있다.

당시 학교에 근무했던 교직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홍 전 총장은 조양호 이사장과 경복고 동기였지만, 재단이사장과 총장 사이의 관계 때문인지, 조양호 이사장과 학교 현장을 함께 돌아볼 때면 이사장의 말을 꼼꼼하게 메모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줘 총장으로서의 권위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인상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런 홍 총장이 당시 막 이사가 된 30대의 친구 딸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 사퇴했던 모습은 인하대 총장의 어두운 역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홍 총장이 갑자기 사퇴한 내막에 대해서는 조현아 파문 이후 최근 언론에 뒤늦게 공개됐지만, 2008년 당시 언론에서도 대서특필된 바 있다. 특히 <경인일보>는 당시 자세한 상황을 보도해 독자들로부터 재단의 전횡에 대한 비판을 끌어낸 바 있다. 그러나 현재 해당 기사는 경인일보 웹사이트에서 지워진 상태다. 


2008년 12월 당시 홍승용 총장의 갑작스런 사퇴 내막을 보도한 언론기사 링크(http://www.inha.ac.kr/plaza/talktalk/talktalkView.asp)
(인하대 인하광장 홈페이지, 붉은 상자가 삭제된 <경인일보> 당시 보도기사 링크 주소)
 

홍 총장에 이어 부임한 이본수 총장은 4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2012년 2월 임기를 마쳤다. 이본수 총장에 이어 총장의 경복고 후배로 인하대의 구조조정과 개편을 총대메고 제13대 총장으로 취임한 박춘배 총장은 또다시 자진사퇴의 형식으로 잔여 임기 1년 2개월 여를 남기로 사퇴했다.

그러나 박 총장의 사퇴가 자진사퇴라고 믿는 인하대 구성원은 거의 없는 듯하다. 한 인하대 구성원은 박 총장의 갑작스런 사퇴를 "야반도주한 총장"이라고 표현했다. (3회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